2010년 1월 28일 목요일
이승이라는 똥밭, 방울뱀
산 세월이 적을 수록 죽음에 이끌리는 충동이 강하다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10대 시절의 몇 가지 고민은 지들끼리 몸을 섞고 다시 한 덩어리가 되어 경계 없이 커다래져버렸으므로, 몸을 불리는 고민들을 보고 있자면 어안이 벙벙하고 암담하기만 했던 것도 같다. 결국 따져보면 집구석이 싫다는 것이었는데, 이런 집에서 나가기란 얼마나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인가, 돈은 얼마나 필요하며, 어른 타이틀을 얻을 때까지 어떻게 버틸 것이며를 계산하다간, 그 모든 것은 너무나 요원하고 멀리멀리 가물가물 하는 것이므로 아뜩한 마음에, 에라이 죽어버리자, 했던 때도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것들이 이미 지난 일이라, 그대로 지날 수 있던 일이라, 다행이다.
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란 소린 똥밭에 안굴러봐서, 똥독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하고 입이 댓발 나오고 심통이 날 적엔 종종 내세라는 것, 그러니까 조금도 내 소망이 반영되지 않은 내세를 상상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내겐 그 내세의 형태가 방울뱀의 삶이다.
카프카는 잠들었다가 문득 일어났을 때 갑충이 된 <잠자>를 그렸지만, 나는 그 불행의 무한대의 형태로 많은 다리와 딱딱한 갑피만큼 곤란한 것이 있다. 걸음 대신 배밀이로 바닥을 훑고 다니는 비늘류의 피부를 뽐내는 레알 뱀눈깔의 방울뱀. 산 속에 온 사람에게 뭔가를 전해보려 고개를 세우면 공격태세로 알 것이며, 어이쿠 공격하려는 게 아닙니다,라 전해보려 입을 벌리면 우리엄마조차 아무리 애써도 예뻐보이지 않을 것이며, 샤샤샤샤 하는 혼신의 소리는 상대를 공포 상태로 몰아넣을 것이다. 게다가 사회에 쌓인 것도 없이 일평생 '독을 차고'다녀야 하다니. 오오, 방울뱀이 되기 전에 아무 말이나 많이 해버리지, 싶어진다. 말이며 글이란 것이 아무리 오해란 것과 도저히 헤어질 수 없는 불륜관계에 있다 해도, 방울뱀보다는 많은 말을, 오해와 이해 사이를 기웃기웃대며 많은 말을 했으면 싶어진다. 신발을 신을 다리도 두 개나 있으니 고무밑창 떨어지도록 걷고 걷고 걷자 싶어지는 것이다.
(신발을 한 켤레만 사도 된다는 점도 꽤 다행이다. <잠자>는 그 많은 다리에 신을 신발이 없어서 방에서 죽은 것일지 누가 알랴.)
위의 방법은 각자 사정과 취향에 따라 방울뱀의 자리를 아메바, 플라나리아, 황소개구리, 부레옥잠 등으로 채워 쓰면 요긴할 것이라 생각한다. 좋아하는 생물은 아무리 넣어봐야 이승의 똥독을 참는 데에 별 도움이 안된다.
2010년 1월 19일 화요일
신선 놀음
손발을 재게 놀려가며 홀서빙도 주방 설거지도 못하는 나는, 엄마 일을 도울 수 없다. 허생원 코스프레로 책상 앞의 7년을 지켜가며, 어허, 10년을 채우려했거늘!하며 괜히 버럭댈 수는 없어 늘상 우는 소리나 한다. 어떤 생산활동도 결핍된 생활들은 가히 누군가의 노동으로 연명되는 신선놀음이라, 나는 어떤 종류의 죄책감에 시달린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표현을 떠올리니 까진 무릎에 소독약을 부어 부글부글하는 걸 으악, 따가워 하며 묘한 쾌감으로 보고 있는 기분이다. "그는 못됐다. 그는 감상적이었고 또 못됐다." 감상적인 동시에 못된 인간. 부빌 언덕에 기대고 살 것이면 뻔뻔하게, 신선놀음도 뻔뻔한 편이 낫지, 눈물은 눈물대로 흘려가며 정작 신선놀음은 멈추지 못하는 형국이라니. 이 순간 감상적이고 동시에 못된 인간은 으악 따가워 하며 상처에 부글부글 소독약을 조금 더 붓는다.
까진 무릎에 빨간약을 바를 시간은 언제인가. 딱쟁이를 어서 얹고 밖에 나가 신발신고 놀 시간은 언제인가. 뒷통수 뒤로 어미 얼굴을 잊고 전봇대에 고무줄을 매어놓고 진땀을 빼며 해지도록 놀 시간은 언제 오는가.
2010년 1월 1일 금요일
순발력 결핍자
대학에 가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내가 특별히 수강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체육시간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애물 달리기 따위는 언제나 나를 위축시켰다. 뛰기나 넘기, 둘 중 하나만 시켜도 심란한데, 뛰다가 갑작스레 나타나는 장애물(아무리 쳐다보며 뛰어도 장애물은 늘 급작스레 나타난다)을 뛰어넘을 도약점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신비에 가깝다.
어떤 종류의 순발력은 체육시간이 아니더라도 나를 좌절시킨다. 가령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을 건널 때, 좌우를 확인했음에도 갑자기 차가 돌진하면 나는 매우 재빠르게 그냥 몸이 굳는다. 쇤네, 몸값도 헐값입니다, 치고 가시오. 공이 날아 올 때 눈을 감는 속도에 버금가게 그저 길 한복판에 멈춰서는데, 이건 개체수가 급격히 줄고있는 멍청한 초식동물같다. 위험 앞에서 피하기보다 몸이 굳는 편이 속도가 빠르다니 세포 하나하나까지 게으른 느낌.
그러니 년도 끝수가 9일 적마다 잘 나오는 재난영화에 늘상 등장하는 민폐형 캐릭터가 될 것이 분명하다. 뒤에 파도가 들이닥치는데 전선 따위에 걸려넘어져 "먼저가" 같은 도움안되는 말만 하는 인물. 그래서 생각건대 나는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갑판으로 앞사람을 밀치며 달려가는 사람이느니 우리 마지막 연주를 합세, 하며 차오르는 물을 보며 바이올린을 켜는 악사이길 바라는 것이다. 이건 품위를 지키는 것으로 포장한 순발력 결핍자의 꼼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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