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4일 수요일

눈, 관찰, 알아보기


- 3월에 오는 눈ㅡ 드물다 하면서 매년 내리고 있다 ㅡ에 어떤 쓸쓸함이거나 센치함이거나 좌우지간 애매한 감정이 들어 잠시 사무쳤다. 창문 가까이 발을 겹쳐모으고 누워, 온 시야를 창문으로 채우고 있었다. 눈이, 정말, 많다, 크다,외에도 좌우지간 애매한 감정에, 한참 보았다. 3월의 눈. 학기 마지막에 모든 연례 행사가 끝난 뒤에 슬그머니 전학 온 외국인 전학생을 보듯, 아니 왜 이제서야?

눈이 쌓이는 지점은 언제인가가 궁금해졌다. 바닥을 보고 있으면 내리는 족족 녹아 사라지는데, 어느 순간 눈은 쌓이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그 같은 자리에 몇 개의 눈이 몸을 쳐박으면 그 위로 언젠가 한놈은 살아 남고 그 위로, 또 그 위로 쌓이기 시작하는 것인지.

과도한 센치함이 섞인 관찰인 것도 확실하다.



- 소수의 취향, 마이너의 취향은 누군가가 그 취향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손붙들고 방방 뛰며 반가워하게 된다. 때론 반가움을 넘어서서 어떤 서러움, 오열, 추운 데에서만 늘상 지냈던 사람의 쓸쓸함도 드러난다.

객지에 있는 어디든 맛은 보장된 셈이라 기사식당엘 종종 가는데, 지난 번에 간 곳은, 아주 담박한 맛이 일품인 나물무침이 있었다. 손도 많이 갈 것 같다. 엄만 내가 손이 많이 가는 것만 귀신같이 알고 좋아한다고 말했었다.
깨끗이 싹싹 먹고, 한 그릇 더 달라하며, 이거 참 맛있네요, 했을 적에 식당아주머니 눈빛이 생각난다.
내가 이걸 지방에서 먹어보고, 이 맛이 너무 좋아서 배워갖고 만든 건데요, 드디어 알아보는 사람을 만났네.

똑같은 그릇에, 김치와 콩나물과 두부조림과 어떤 구분도 없이 똑같이 내어 놨지만 그냥 나물이 아닌 것.

눈길 한번, 제대로 된 관심 한 번을 못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 그것을 늘상 응시하는 것.
그러다 '알아 보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 이런 것들엔 '인연' 같은, 꽤나 신비함을 가운처럼 두르고 있는 단어도 어울리겠다.

2010년 3월 20일 토요일

느릿느릿 누릿누릿


- 평소 작업 속도가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 장단맞춰 일등기록으로 내 평균치를 따졌던 모양인지, 속도가 느려 미칠 것 같다. 이러다 답답해서 가슴이 터질거에요, 빵빵.

속도를 좀 높일 참이면, 머리에선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 신호만 깜빡깜빡.


- 어이, 그 곤란한 지금은 언제 끝날거 같소? 하냥, 기다리면 되는거요?


- 어제는 정말이지 하늘이 흙탕물 같았고, 바람불 때 숨을 들이마시면 모래냄새가 났다. 코 안이 써글써글.
3년인지 4년전인지, 황사가 심하던 날, 콘텍트렌즈를 끼고 나갔다가 각막염과 결막염에 잘도 걸려, 다음 날 고름이 눌어붙은 눈이 떠지지 않았던 이후로, 고름에 불어터진 눈을 보고 어메, 저건 물고기여 사람이여, 했던 이후로 황사가 정말 무섭다. 그때 안과에서 처방해준 약의 부작용 중엔 "심신허탈"이 있었다. 무슨 안약이 심신을 허탈하게까지 하는 걸까. 이것도 무섭다.


- 어제는, 정말이지, 전국에서 일제히 초등6학년 언니들이 운동장에서 부채춤을 춘 마냥 모래바람이 일었다니까요.
공기중에 둥둥 뜬, 10의 백제곱, 구골개의 먼지 무리를 무슨 수로 막는다지요. 무섭네요. 무섭네요.



2010년 3월 6일 토요일

죽도록 떠들기

- 도서관 서가에서 차지하고 있는 단순 면적, 책 두께만으로도 사람 기죽이는 작가들이 분명 있으므로 ㅡ 가령 니체라든가, 데리다라든가, 도스토옙스키라든가, 발자크라든가 ㅡ 아니 이사람들은 뭔 할말이 이리 많누 했다간,
글 줄 하나, 문단 하나를 못넘기고 끙끙대는 소심한 작자는 결국 조금 부러워진다.


도스토옙스키는 낭독법으로 글을 썼다고도 하고, 발자크는 빚쟁이 피해서 위장에 커피를 들이부으며 썼다고도 하고. 저 두꺼운 책 앞에서 자못 궁금해진다. 저 양반들, 대체 자기가 쓴거 다 읽긴 하는걸까. 친구의 대답은 ㅡ 읽을 시간이 어딨어, 빚쟁이 오는데 얼른 쓰고 도망가야지.


- 결국 입심 딸리는 무산자의 글쓰기를 독려하는 것은 채권자의 협박뿐인가.

입심은 딸리는 채로 채권자만 남아 하냥 달리기만 는다면. ㅡ 이런 그림은 퍽 암울하다.



- 아무리 짱구를 굴려도 글은 비루하여, 소심한 작자는 이렇게라도 입을 가벼이 하는 연습을 한다.



2010년 3월 5일 금요일

오한과 발열 사이



- 몇몇 장면들은 신경을 에누리없이 곤두세워 안면없는 사람에게라도 일갈하고 싶어지게 한다. 가령, 버스에서 어린 애가 대강 앉아있는 걸 나몰라라 하고 딴 곳에 앉아있는 부모라든지, 횡단보도 앞에서 애들이 까불까불 몸을 흔들어대는데 잡고 있을 생각도 안하는 부모라든지.

애들은 대강 앉는 게 어떤 건지 확실히 보여주므로 한순간만 눈을 돌려도 손잡이에 머리를 꽝 박고, 등받이에 머리를 꽝 박고, 기둥에 머리를 꽝 박고, 바닥에 내던져져 구르다가 머리를 꽝 박을 수 있다. 하필 내 옆에 앉은 애가 대강 앉아 있었고, 부모가 나몰라라 건너편에 앉아 신경도 안썼고, 나는 일갈의 욕구를 이를 덕덕 가는 데에나 쓰다가, 급정차 한방이면 애가 바닥에 나뒹굴다 머리를 꽝 박을 영상이 가시질 않아 내 자리로 애 엄마를 앉게 했다. 자리를 옮겨 앉다가 애 대신 내가 의자 손잡이에 착석해 버렸는데, 그때 이후로 허벅지 뒷쪽에 주먹만한 보라색 피멍이 여직이다. 그래서 여직 이도 덕덕 갈고 있다.


- 불안이 고질병으로 번질 때면, 미래의 온갖 '최악의 시나리오'를 작성한다. 사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온 하루를 치욕 사건이 점철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모든 선택들이 나를 배반하여 완전히 궁지에 몰리는 미래의 어떤 날을 그려보고 널부러진 마흔 쯤의 나를 보며 한숨을 폭폭 쉰다. 나는 이런 능력은 좀 있다. 과연 쓸데는 없는 능력이다.


- 말 한마디로 불안이 증폭되게 했다는 사유로 남친에게 딱밤을 약 5대 때렸다. 오, 누가 처음부터 뺨을 치려 했겠는가, 시작은 누구나 이렇게 (귀여운) 딱밤정도인 것이다. 나는 더욱 폭력적으로 변질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나 이런 능력 있다고 이미 말했다)


- 그저 '지금'을 살라는 말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아서 늘상 정수리 위엔 미래의 숱한 마이너리티 리포트들이 너울너울하다. 나는 하냥 오한과 발열 사이를 오가며 불안해한다. 모골이 송연해졌다간 열이 풀풀 났다간.


- 근데 넌 대체 뭘 할려고 이지랄이여, 이지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