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4일 토요일

단상에 오르는 것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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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상의 권위는 수상작이 대변한다. 심사단의 자질이 아무 문제 아니라는 것이 아니나, 그 자질 또한 수상작이 말해준다. 혹은 그래야 모양이 좋다. 수상작 수준이 개차반인데 상의 권위를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 심사위원 개개인이 잘나고 멋진 사람들이라서 그 상이 멋져지는 게 가능한가? 개차반인 수상작을 두고 쓴 멋진 심사평이란 것은 가능한가?

작품이 엉망이면 상도 심사단도 심사평도 마침내 희극적 장면의 익살꾼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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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수상자가 아니란 이유로 쿤데라를 의심해본 적이 단한번도 없듯이, 그 반대로, 무슨무슨 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작품수준에 대한 의심이 말소되는 경우도 단한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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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문씨를 떠올린다. <바셀린 붓다>가 동인문학상 후보로, 결코, 전혀, 절대로 선정하지 않을 것이면서도, 후보로 올려놓은 것에 불쾌감을 느꼈다고 하는 점이나, 한국 문학상은 받고싶은 상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점에서, 지난 십여년 동안 켜켜한 그의 피곤과 피로를 느낀다. 분명 피곤한 일이다.


짜증은 말하고 싶지도 않다, 짜증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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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의 <어나벨>이 받아보니 보이스피싱이더란 말을 수상작가 및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휘장을 걷어내고 말할자 누구인가. 누가 그 피곤과 피로를 이겨내고, 짜증내지도 지치지도 않고 말하며, 단상의 광채에 눈멀지 않고 존재해줄 것인가.



2010년 12월 2일 목요일

낮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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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배운 것들의 구할팔푼이 쓸모가 없다는 것, 어쩌면 가나다라 떼고 안넘어지게 걷는 법 잘 배웠으면 그 다음은 학교에 기대할 것도 실망할 것도 별반 없다는 것, 이런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학교 담장을 넘어나오기가 두려워지는 것은 무엇이냐. 쓸모없는 것을 붙들고 그것만 쳐다보느라 귀닫고 눈 어두울 적의 그 깜깜하고 갑갑한 느낌이 좋기도 하다면, 이게 그저 매저키스트의 궁색한 푸념만은 아닐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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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낭비를 견뎌내는 것이 업, 숙명, 팔자, 그런 류도 있을 것 같다는 말로, 또다시 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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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업을 이어가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늘상 저 방구석의 깜깜하고 갑갑한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고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불쑥불쑥 열두번 곱하기 열두번으로 드는데,


퇴근하고 그토록 원하던 깜깜한 방에 도착하면 꾸벅꾸벅 졸고 앉았는 상태에는 복장이 터져 팔짝팔짝 뛸 판이다. 그럼에도 쏟아지는 졸음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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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 길들여진다는 것은 밤을 그리워하며 낮을 버티다가 정작 밤을 맞으면 낮의 피로를 견디지 못하여 잠이나 자는 날들, 그 실망에 무두질 당하는 것이다. 희망의 각질제거에 효과적이다.


 


 

2010년 11월 20일 토요일

송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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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같은 강물 위에 송어가 뛰노네

살보다 더 빠르게 헤엄쳐 뛰노네

나그네 길 멈추고 언덕에 앉아서

거울같은 강물 위의 송어를 보네

거울같은 강물 위의 송어를 보네


한 어부 산기슭에 낚싯대 드리우고

뛰노는 송어들을 낚으려 하였네

그것을 내려보며 나그네 생각에

이렇게 맑은 물에 송어가 잡힐까

이렇게 맑은 물에 송어가 잡힐까


마침내 그 어부는 꾀를 내어

흙탕물을 일으켰네

강물 위로, 흐려진 강물 위로

송어는 낚여 올랐네

언덕의 나그네는 마음이 아팠네

언덕의 나그네는 마음이 아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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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사람을 잡을 때에도 혼탁하게하여, 흙탕물을 일으켜,

제놈이 원체 살보다 더 빨랐을지라도, 멍청해진 물속에서 분간하지 못하고 미끼를 물도록,

마구 어지럽히는 것이다.


그것을 내려보며 나그네는, 그대로 언덕의 나그네이므로 마음만 아프고 별수가 없다.

강물 위로 뛰노는 모양이 분명 마음을 잡아 끌었을 텐데도, 그것은 송어를 놓아줄 수 있도록까지는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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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내 스스로 낚이지싶게 마음이 흙탕물같다. 마음 쓰는 모양도 차차 더럽다.

이런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도록 어지러운 와중,

이 모든 고민이 참 낭비다 싶었고, 마침내 언덕 위로 기어올라 마음만 아프고 별수없는 나그네 행세를 자처한다.

 

2010년 10월 30일 토요일

[고양이의 이면] #2


- 비열한 얼굴

- 귀와 팔에 크레파스 똥이 묻었다. 모나미볼펜에 견줄만큼 배변량이 굉장하다.

2010년 10월 29일 금요일

[고양이의 이면] #1




이면지 + 사은품 크레파스.
동거묘 무아.

포스트 통곡물 시리얼 박스에 크레파스 사은품이 붙어있어 그려보았다.
괜한 사은품으로 시리얼 가격을 높여놓았을까봐 걱정이 되었으나
괜한 걱정일 만큼 크레파스 품질이 형편없었다.
발색이 아주 더러워서 마음에 들기도 한다.

박제가 되어버린 파리를 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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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도서관에 신청해서 본 책.
행간에 파리가 죽어있는데 가만히 보니 시체가 아니었다.
아글쎄 인쇄된 파리의 주검이라지.
리을에 거꾸러 붙은 자세로 짜부러져 몇부에나 찍혀나갈까.

파리야, 행간의 감옥에서 도망가라, 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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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의 감옥에 갇혀보자, 하고 시작하지 않았음에도 매번 그렇다. 실패를 기록하는 실패 자체로서의 글.
다만 짜부러지기 전에 퍼덕거릴 따름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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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의식을 못떨치는 거야 쿨하지 못해 미안하면 그만이련만
실제로 부채가 쌓이면 똥구녕에다 불을 놓는 생활이 된다. 항문을 통한 화형을 맞이하며 에헤라디야 부채춤이나 추는 거다.

그러나 말만 이렇게 하고 간밤엔 머리가 숭덩숭덩 빠져서 정수리에 주먹만한 땜빵이 생기는 꿈이나 꿨다.
프로이트도 융도 다 필요없이 이럴땐 운세사이트의 두루뭉술한 해몽이 아주 적격이다.
나쁜 말이면 안 믿자고 보지만 결국 남는 건 흉몽의 그림자라니, 오호 통재라.


행간과 부채의 감옥에서 함께 탈출하자구나, 파리여.


2010년 10월 20일 수요일

모기잡기의 부수적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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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이 시려울 정도로 차가워진 공기에 모기가 유유히 날아다닌다는 것은 이제 이상하지도 않은 일이지만, 양말을 껴신으며 모기를 잡아야하는 데엔 확실히 억울한 구석이 있다. 양말을 신는 순간 돌진한 모기를 향해 손을 휘둘렀고 손끝에 모기가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다. 손끝에 전해지는 모기의 속도감. 어쩌면 의외의 무게감.
모기가 피를 빠는 대신 떼를 지어 저렇게 인간에게 몸을 부딪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모기가 떼를 지어 피를 빨았을 때만큼, 부딪는 모기에도 나는 창백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어쨌거나 모기는 충돌감만 남기고 어딘가 어둠 속에 숨어 나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물론, 수면양말을 신어야 할 때까지도 모기가 도처에서 돌진한다면 이런 감상따위 개나 주고 나는 그저 심성이 고약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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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생각을 하자면 자연히 우울이나 무기력이나 초조와 불안이 고개를 쳐들고 마침내 나는 쳐울고 마는 일이 요근래 빈번하였다. 고약한 자기연민일 수도 있었고, 감정소모일 수도 있었고, 어쨌거나 그 우울에 푹 잠겨 바닥짚고 헤엄치면서라도 앞으로 가면 그만이다 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제 처지를 야생초 삼아, 참고참고또참지울긴왜울어로, 캔디를 쭉쭉 빨게 두고 싶지는 않다. 그냥, 울만큼 소모할만큼 버릴만큼, 그만큼 충분히 하지 않았나 싶다. 요는, 쳐우는 제자신이 지겹다는 말이다.

어떤 날은 울다가 지나가는 모기를 잡았는데 눈물이 자연히 그쳤더랬다.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서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육체인 모기를 볼 수도 없거니와 그의 종적에 집중하자면 눈물은 마른다. 그렇다. 적어도 모기만 잡아도 눈물은 그칠 수 있다. 쪼그려앉아 울자, 하지를 말고 뭐라도 하면 그렇게 된다.





2010년 9월 26일 일요일

달과 목성과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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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입이 궁해도 신세타령과 남걱정과 텅빈 덕담만은 말자고, 새삼 다짐하였다.
때는 보름달이 둥실한, 옆에 목성을 끼고선 휘둥그레 달뜬, 그 추석의 밤이었으니.
상점들이 문을 닫아 간판불도 단체로 휴업중인지라 별이 잘보였다. 저 목성은 성능이 아주 바닥인 망원경도 줄무늬를 보여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땅바닥의 나약한 닌간의 맨눈, 아니 렌즈 없이는 글자 구분도 못하는 근시안 인간은 백과사전의 조악한 도판이나마 떠올린다. 그 누릿누릿한, 갈색과 누런 대기가 휘감은 목성의 줄무늬를. 8살 때 살던 상가 건물 옥상에서 잠들었던 밤엔 침몰된 해적선이 달을 지나 목성으로 가는 꿈을 꿨고, 배 위에서 사람 손, 아니 벼다귀만 남은 손만 올라와 안녕 안녕 흔들다가 배의 낡은 나무판을 내 머리위로 떨어뜨렸다. 소리를 지르며 발차기까지하며 깬 것은 동네 떠돌이 개가 다리를 무는 꿈을 꾼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 해골은 퍽이나 킬킬거릴것이었을거외다.

추워서 들들 이를 갈자 언니가 목을 감싸준답시고 헤드락을 걸었다. 어두운 밤에 두 과년한 여자가 택껸도 씩이나 할 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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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사건 사이에 과민한 감상이나 눈물바람이 없이도 다음 사건으로, 다음 날로, 다음 일로 덤덤히 넘어가는 것이 생활인이다. 힘든 일과 고된 상황 사이에 숱한 눈물을 집어넣지 않고도 호들갑 없이도 싸목싸목 다음 날을 준비하는 생활인인 엄마를 떠올린다. 그에 비하면 나는 감상적이고 못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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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과 흰색 무늬가 뒤섞인 길고양이의 밥을 몇번 챙겨준 후로, 길고양이가 꽤 아는척을 한다. 이놈에게 딸린 어린 고양이는 아주 활기있다. 사람한테도 경계심이 없어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해코지나 당하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어미가 한동안 보이질 않는다. 비가 무섭고 바람이 사납던 날들에 견뎌내질 못하고 아주 가버린 것은 아닌가 역시 염려가 된다. 길고양이 밥을 좀 더 챙겨주고 싶은데 그러자면 감상을 좀 줄이고 생활인이 되어야한다. 빠듯한 생활이라도 이만큼만의 잉여만 주어지면, 나는 목성의 줄무늬를 보고자하는, 그정도의 잉여를 향한 욕망은 조금 더 누르고 살 수 있을 것같다.


2010년 9월 8일 수요일

발이 시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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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나는 겨울이 좋다, 겨울이 좋은 이유는 따뜻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던 사람을 알고 있었다. 관절염만큼 지긋지긋한 수족냉증을 앓는 나로선 게 무슨 헛소리뇨,로 응대할 뿐이었으나 그의 계절에 관한 취향 선언은 잊을만하면 신경을 긁어대었다. 겨울 좀 좋아하는게 무슨 잘못이며 대체 무슨 신경 긁힐 일인가 하면서도 난 왜 배알이 꼬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전 책에서 읽은 구절이 그때 왜 심사가 뒤틀렸었나를 알려주고 있지 뭔가.

"겨울이 좋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가 겨울을 날 준비가 된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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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무릎을 쳤다. 익키! 이런 까닭이로세. 겨울만큼 벽 두께의 차이를, 날림으로 지어진 집과 살기 좋은 목에 제대로 지어진 집의 차이를 선뜩하게 알려주는 계절도 없다. "겨울이 좋다"를, 심지어 "따뜻해서 좋다"를 읊어대는 그 사람은 취향 하나를 드러내면서 나는 좋은 집 살지롱, 안좋은 집에서 겨울 나기에 힘들어본 적도 없지롱, 뜨끈한 히터 나오는 차도 있지롱, 등에서 땀날 정도로 좋은 외투도 있지롱,을 일격에 알려준 것이된 셈이었다.

..... 저 자랑질이 다 맞는 말이었다는 것이 왠지 확신을 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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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잇살 먹어도 숨겨진 '느집엔 이거 없지?'를 마주칠 적마다 입이 댓발 나온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비 소식이 있고, 나는 겨울은 무슨 수로 버틸 요량인지 벌써 발이 시렵다.


2010년 8월 22일 일요일

<소망 없는 불행>, 페터 한트케

   겨울이 되어 건축 일이 없으면 실업 보조금이 지급되었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것으로 술을 마셨다. 그녀는 그를 찾아 이 술집 저 술집 뒤지고 다녔고 그럴 때면 그는 고소하다는 듯 악의에 가득찬 채 그녀에게 남은 돈을 내보이곤 했다. 그에게 두들겨 맞지 않으려고 그녀는 몸을 피했다. 그녀는 더이상 그와 말하지 않았고 말없이 겁에 질린 아이들이 후회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매달리는 것을 밀쳐냈다. 마녀! 너무도 매정하게 구는 어머니를 아이들은 적대감에 차서 바라보았다. 부모가 외출하고 없을 때면 아이들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잠을 잤으며 아침녘에 남편이 아내를 방으로 밀어 넣으면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뒤집어썼다. 발을 디딜때마다 그녀는 멈춰섰으나 이내 그가 어머니를 방으로 밀어넣었다. 두 사람 다 집요하게 입을 다물고 있다가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어 <짐승같은 놈! 짐승같은 놈!> 하면서 그가 기다리고 있었던 말을 하면 그 말 때문에라도 그는 그녀를 제대로 팰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얻어맞을 때마다 잠깐씩 그를 비웃었다. (pp.49-50)



예전 다섯 식구가 바글바글 얽혀 살던 낡고 낡은 아파트가 뉴스 보도자료 화면에 나오자, 용케 저기서 다섯이 엉켜 살았구나 싶었다. 그 공간은 나 한몸 앉고 누워 있을 때는 좁아도 그냥 좁은 것이었는데, 카메라의 눈을 가져다 대니 도무지 사람이 살 수 없게 좁아졌고 낡고 부스러지고 있었다. 무슨 사건이 있어 보도되는 중이었는데 나는 내용도 못듣고 거즘 반 충격으로 그 공간을 보았다.


게다가 술을 즐기고 식구들을 두들겨주는 것으로 제 답답함을 푸는 아버지가 있으면 더없이 좁다. 피할 곳이 없으니 몸을 쪼그리고 쪼그려 없는 척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려운 시절의 저 흔하디 흔한 폭력. 저 많고 많은 환멸. 많이들 맞아서 괜찮아진다는 소리가 아니라 예사로운 큰 소리에도 가슴이 덜컥덜컥하게 되는 것이, 어미와 아이들이 여기저기 맞고 훌쩍대는 것도 일상이 되더라는 말이다. 반복으로, 일상으로, 스며든다는 점이 무서운 것이다.

2010년 8월 17일 화요일

서정 시대_2010.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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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단어에 한 번씩 씨발이나 존나를 섞어 별볼일 없는 삶을 토로하던 학생 둘이 버스 내 뒷자리에 있었다. 말하는내용이나 시위하듯 드높이는 목소리는 매한가지여도, 한 명은 근거 없는 희망으로, 다른 한 명은 설득력 없는 절망으로 귀결하는점이 다르다면 달랐다. 다시 말해, "씨발, 말하다보니까 기분이 쫌 좋아졌어"와 "그래? 난 아직도 짜증 대박나. 존나 콱죽으까"로 갈렸다가, 다시 크크크크 하는 바닥 긁는 웃음소리와 서로를 향해 "병신"하며 대화를 마무리지었던 것이다.


하루는 내가 티끌만했다가 다음 날은 우주 같아지는 저 서정시대의 지난한 진자운동을 끝내는 방법은 나이를 먹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면, 진자운동이 끝나고 마침내 어느 곳에 내릴 수 있게 될까.

2010년 8월 16일 월요일

자정의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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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자정 무렵에 된장찌개를 끓였다. 얼마 전 국물내기 최고의 듀엣 멸치와 다시마를 구입했으므로 냄비에 이 듀엣과 굵게 썬 무를 넣고 국물을 우려내었다. 그리고 물이 끓을 동안 감자 껍질을 벗기고 고추를 썰고 버섯을 찢고 두부를 잘랐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유연하게 노래를 부르며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유를 과시하는 것이다. 된장찌개 정도야!


엄마가 요리할 때는 꼭 서너가지 음식, 그것도 나에겐 복잡하거나 불안하기 그지 없는 것들을 한꺼번에 하는데, 그것은 언제나 신기한 광경이다. 저 현란한 멀티태스킹이 어찌 가능한가?


서너가지는 안되더라도 재료 준비 시간을 없애며 바로 조리하는 마음의 여유에는 맛에 대한 믿음이 깔려있다. 자신이 없으면 가스불 앞에 서서 1분에 한번씩 휘저으며 고개를 갸웃대며 땀을 삐질거리며 맛을 보고 입맛을 짭짭 다시고 고개를 다시 갸웃대면서 결국 사먹는게 싸다는 결론을 내게 되므로. 내게 맛에 대한 자신감을 실어준 멸치와 다시마 듀엣에게 다시 한번 축복을 내리사.


<어느 비평가의 죽음>, 마르틴 발저

 제가 선생님께 상기시켜 드리고 싶은 점은 실패는 일종의 병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병에 걸린 사람은 사회적으로 대인관계가 껄끄럽습니다. 실패자는 ㅡ 제가 실패한 사람을 이런 명칭으로 불러도 좋다면 말입니다만 ㅡ 자기 자신한테보다도 주위 사람들한테 더 민망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실패자에게는 자신의 실패가 엄청나게 큰 확대경이며, 그는 이 확대경을 통해 온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 성공한 사람도 아직 그렇게 보지 못했을만큼 그렇게 세밀하게 세상을 보는 것이죠. 세상을 대강 보는 것이야말로 성공의 조건들 중의 하나인데, 모든 직업이 다 그렇죠.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인지할 능력이 없는 것, 이것이 성공의 조건입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세상을 미화해서 봅니다. 그가 설령 어떤 사물이나 어떤 인물에 반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미화하는 반대자일 따름이죠. 그는 항상 빼어난 사람으로 살아남게 되고 세상은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한 사람이 있기에 세상은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한 사람이 세상에서 성공을 거두기 때문에 세상은 좋은 것이죠. 그러니까 이 세상의 근본적인 불행은 그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성공합니다. 무엇인가가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으면 ㅡ 사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말입니다 ㅡ 그건 그에 의해 극도로 비난 받고 저주를 당합니다. 그는 세상이 더 개선될 수 있도록 이 세상에 온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의 현존 상태에 대한 가장 과격한 비판자이지만, 그의 존재의 분위기를 통해 사람들은 이 세계가 구원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에 대해 세상은 그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세상의 개선 가능성을 믿지 못하고 이 세상이 삶의 좌절을 가져오는 불변의 체계라고 여긴다면, 그는 실패자이며 세상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되죠. 그러나 자기 자신의 신경을 거슬리게 되지는 않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말이죠. 실패자의 충족은 사실 그가 거슬리게 되는 이 세상을 완전히 알게 되는 점에 있습니다. 이 인식을 통해 그한테서는 풍부한 지식이 자라나고, 그 속에서는 마치 휘황찬란하고 온갖 음향이 흘러 넘치는 낙원에서처럼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도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모든 통찰의 조건이 실패라는 사실이 실패를 지고의 선 그 자체로 만듭니다.

아직 듣고 계세요?

 
위의 글에서 실패자(루저)란 말이 나와서, 사족의 메모 :

루저라는 단어가 그 어망에 포획되는 사람에겐 좌절감을 준다고들 하는데, 나는 루저에게는 열려있는 방편이 있으므로 (진 다음에는 이길 수 있으니까) 그닥 위험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잉여나 쓰레기 쪽이 더 무서운 것이다. 남아도는 존재가 머물 남아도는 자리는 없으므로.
누구나 다리를 딛고 설 자리가 필요한 것인데 땅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 잉여자가 있을 공간은 전 지구를 통틀어도 한뼘도 없게 된다. 부피를 가진 자가 자신을 얼마나 쪼그라들게 해야 한자리씩 하는 사람들 눈에 '덜 거슬리게' 한 켠에서, 없는 것처럼 살아남게 되는 것인가.
그래서 너 졌어,가 아니라, 넌 누구냐, 왜 여기서 얼쩡거리냐,가 더 공포스럽다.


남아도는 개체수를 조절하기 위해 절벽에서 뛰어내려 집단자살한다는 레밍에 대한 와전된 말들처럼, 잉여자가 택할 유일한 방법은 자발적으로 절벽아래로 사라져주는 것이라면. 잉여자를 꼴사납게 보는 눈들은 그 방법을 은근하게 바란다면 어떤가. 내겐 더없는 납량특집이다.

2010년 8월 14일 토요일

<페르디두르케>, 비톨트 곰브로비치


 "우리가 마치 굴을 입에 넣고 삼키듯이 넙죽 목으로 넘기는 고통이라면, 사탕처럼 달콤한 당신의 수치심, 캐러멜 크림 같은 공포, 케이크 같은 비참함, 사탕과자 같은 고통, 그리고 막대사탕 같은 절망을 나한테 떠벌리지 마시라. 가장 힘겨운 이 사회의 상처, 예를 들어 아이 넷을 부양해야 하는 노동자 가족의 굶주림을 대담한 손가락으로 긁어대는 숙녀는, 어째서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귀를 후비는 일에는 그 손가락을 쓰지는 않는가? 그게 바로 훨씬 더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다. 굶주림, 혹은 전쟁 동안 죽어간 수백만 명의 사람들, 이런 것은 삼킬 수 있다. 심지어 아주 맛있게 삼킬 수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먹을 수 없는 맛없는 화합물들도 있다. 잡다하고 혐오스러운, 그렇다. 토할 것 같은, 악마적인 그 화합물들을 인체는 삼킬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는 바로 취향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렇게 맞추어야 한다. 아내와 아이들이 죽더라도,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더라도, 중요한 건 그 모든 것이 고상하게, 지극히 고상하게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성숙의 이름으로 해야만 하는 것, 여고생의 마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것은 바로 맛있는 것을 거부하고, 입천장에 맞서 혁명을 일으켜서, 더 이상 아무 것도 삼킬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2010년 8월 9일 월요일

심신단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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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복에 밥도 부실히 먹고 요즘 특히나 어지럼증이 심해져 오늘은 모처럼 닭을 먹었다. 먹는 행위로 힘을 내보겠다는 알량한 생각에는 김유정 말년의 그 편지가 너울거리는 것인데 ㅡ 내 닭 백 마릴 고아 먹고 일어나고야 말겠다는 ㅡ 별반 도움은 모르겠고 입에 닭내만 맴돌고 자판 앞에서 몸만 배배 틀고 있어서, 이건 뭐, 닭에게도 면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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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몸에 열이 오르면 쉬이 가라앉지 않아 내심 '때이르게 찾아온 갱년기 아닐까'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언니도 같은 증상에 같은 의심을 품고 같은 진단을 내리고 있었는데, 잠시 대화를 나누고 둘은 "그냥 날씨가 많이 더운거"로 결론을 보았다. 건강염려증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유난히 몇몇 증상에는 새가슴이다. 손에 가시가 박히면 파상풍의 최악의 케이스까지를 떠올려 일가친척친구들이 내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까지를 밀어붙이고 끝난다. 이런 나약한 닌간에겐 냉수마찰과 토끼뜀 수백 회 처벌을 내려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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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나약한 닌간.







2010년 8월 1일 일요일

정신승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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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무엇이 될까. 숱한, 넓은 의미의 거절 모두를 포함해서.

하루 3시간을 단어암기에 쏟아도 영어가 자기를 밀어내는 기분과, 남들 다 좋다는 책 읽어봤는데 나는 아무 감흥도 심지어 내용이 뭔지도 남지 않을 때의 기분과, 이력서 구골개를 웹에 뿌렸더니 이안류를 타고 자기 서버로 돌아와 용량을 꽉 채우는 기분과, 내 글이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한 채 기껏해야 분쇄기에 달달 갈려버릴 때의 기분과.

여기서 영어가, 책이, 온갖 회사가, 편집자가, "모두모두 작당해서 날 밀어낸다!"는 생각으로 번질 수는 있겠으나 그 다음이 문제렷다.
그래서 영어도 책도 회사도 모두모두 애초에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로 가면, 빠이빠이 손을 흔들어주어야 한다.

떠나는 이여 잘가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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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대상부정 단계가 그래서 무섭다. 아 안되네, 아 안됐네,의 약한 체념이면 좋으련만.
사랑 고백 후 거절당하자, 그 여자애가 사실 볼 게 뭐 있냐, 다시 보니까 너무 구려, 심지어 그 여자애가 누구냐,로 가는 일련의 과정이랄까.

신기루, 무의미로 보고 나면 나는 방구석의 정신승리자가 될 뿐.
정신으로라도 이겨서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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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가 마음 먹은 대로 잘 안되는 경험을 나에 대한 '거절'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슨 딱한 버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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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이 일련의 과정이 지난주의 내 심경이다.

[주의] 위의 기분나열은 나의 경우가 아니니 오해마시라.
         내겐 하루 3시간씩 단어암기하는 성실함부터가 없으니까.

[다짐] 쉴드업 공업해서 중이병에서 벗어나자. 밥을 많이 먹어야겠다.


2010년 7월 19일 월요일

의도의 미끄럼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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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밥그릇 밑에 깔끔한 식탁매트를 깔아주었더니 먹이를 물어다 매트 옆 맨땅에 내려놓고 먹는다.
더운 여름 나기에 녀석이 힘들까하여 언니가 마련해준 쿨매트는 본척만척하곤, 신발장 앞 타일바닥에 연히 등을 부비부비 중이다. 진땀 흘려 목욕시켜놓으면 꼭 드러운 데만 찾아 누워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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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지를 잘못 뜯어 가루가 된 쿠쿠다스를 입에 털어넣을 때, 개발자는 깔끔하게 튿어지라고 몇날며칠 밤을 새 고심해 장착했을 포장봉투 속 붉은 개봉선이 보인다. 여기로 뜯으면 잘뜯어지걸랑요, 잡고 당기기만 하면 되걸랑요. 쫓아다니며 말해줄 순 없어 답답한 앙금이 가슴팍을 누르거든, 못본 놈은 가루나 털어먹어라!, 하는 체념이 오히려 상처를 완화시켜줄 것이다. 그러니까 식탁매트가 뭐요, 목욕은 했어도 타일 위가 좋소, 하는 고양이 앞에서 그저 잘해야 유연한 체념 뿐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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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고교시절 겪은 헤프닝도 그렇다. 관심있던 학교 여학생에게 정문으로 나오면 좋다는 뜻, 후문으로 나오면 싫다는 뜻으로 알겠노라 쪽지를 전하고 자신은 정문에 포진, 친구녀석은 후문에 세워두고 휘파람으로 신호를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에 여학생은 교복 치마 밑에 체육복 바지를 겹쳐입는 혐오패션을 감수하고 담을 넘어 도망쳤다. 누구 마음대로 선택의 고문을 시키는가. '마음을 분명히 알아보고 싶다'는 것도 과한 욕심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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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가 전해지는 것이 어디 쉽겠는가. 배려와 사전계획이 세심하고 치밀할수록 무시 앞엔 처참하다.
쿨가이 연출과 굳건한 마음의 쉴드가 필요한 시점이다.


2010년 7월 14일 수요일

트위터 앞에 선 소인배의 불안, 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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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를 시작해볼까 싶은 중이다. 마음을 덜 먹었고 아이디도 아직 만들지 않았다.
숱한 유혹에도 나는 귀도 이름도 없소로 일관하더니 왜 이제서야, 하는데엔 <창내고저 창내고저 이내가슴에 창내고저>정도로 대답하면 좋겠다. 이걸 "소통에의 욕망"으로 이름붙이면 나는 발가락 손가락을 말아쥐고 구석으로 숨을 것이다.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된 단어가 있기 마련이다. '녹색'이나 '희망'이나 '소통'을 맘편히 쓰기엔 어린백셩이 니르고져 홇배이셔도 마참내 제 뜨들 실어 펴지 못할 기분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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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게 말해 인사성 좋은 분들의 트윗을 보고 뜨악해진 사람들은, 사진마다 "엄머언니어뜨케그르케이뻐영"하는 리플이 인기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싸이의 세계가 트위터에서 부활하는 공포의 너울거림을 본 것이리라.

<여기까지 이러면 나는 어디로 가란 말이냐!>는 이 '칭찬 잘하는 언니들의 세계' 앞에서 공포로 치닫는다.
오, 창내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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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고사 주간에 부응하여 한국여류소설가들의 단골 표현에 기반한 퀴즈를 만들어본다.

1. 소름은 어떻게 돋는 것이 좋은가?
정답 : 오소소

2. "그가 내게 (    ) 다가섰다." "불안하여 손톱을 (    ) 잘랐다." 괄호안은?
정답 : 바투

3. "부끄러웠다. 얼굴이 (     )했다." 적절한 표현은?
정답 : 홧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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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현들로 점철된 소설은 가만히 책장을 덮고 한켠으로 치운 뒤 다른 것을 읽고 있다.


2010년 7월 12일 월요일

미용실_2010. 7. 12.

머리 길이가 좀 더 짧았으면 좋겠다는 나와, 지금이 충분히 좋다는 미용사의 의견이 부딪히자, 미용사는 얼굴에서 웃음을 잃지 않은 채 부지런히 1mm씩 머리를 잘라주고 있었다. 어쨌거나 손님의 말을 존중해 받아들여준다는 재스쳐일 것이라, 끝내 가위는 허공을 잘라내고 있었다.
섀도우 가위질이 안쓰러워 그만해도 된다는 표시로, "이제 좋아진 것 같다"라고 하니, 미용사는 "작은 차이도 본인에겐 크니까요"라며 가위질을 멈추고 날 보고 씩 웃었다. 어떤 의견 반영은 퍼포먼스로 충분한 것이니까. 혹자는, 손님과 언성높여 싸우는 대신 섀도우 가위질을 해줄 수 있는가 아닌가가 미용업계에서 살아남을 암묵적 단계라 평하기도 했다.

꽃을 꽂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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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평도 평인지라, 무플이 굴욕인 시대에서는 어쨌거나 입에 오르내리면 도움이 된다.
듣보잡은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 아니라 들어도 보고 보기도 한 누군가일 수밖에 없으므로.
거지같은 무언가가 마케팅 꽃을 달고 치맛바람을 일으키거든 나는 다만 입을 다물기로 하였다.
내 일언반구 언급이나 하나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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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어제는 거지 발싸개 같은 무언가가 꽃을 단 모습에 기분이 절로 거지같아졌다.
집에 와서는 현기증이 몰아닥쳐 뒤로 쓰러져 바닥에 허리와 머리를 박았는데 그 와중에 나는 누울자리를 보고 이불위로 쓰러진 것이다. 새카맸던 눈앞이 살살 밝아지자 낄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병원 갈 일은 안만들자고 작당한 몸의 반응이 우습기도 하거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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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앞에서 쓰러졌을 땐 엄마가 고기반찬을 해줬었다. 그래서 저번에 엄마가 손에 들려 보내준 고기를 아침 댓바람에 구워먹었다. 엄마가 눈물 쏟을 일은 안만드는 게 좋다.
꽃은 말이 없고 그래서 여기저기 매달리고 꽂히는 팔자다. 그러니 꽃을 욕해서는 쓰나. 꽃까지 미워지는 마음이야 애인이나 친구에게 각자 찡얼대도록 하고, 여기저기 꽃가루를 남발하는 밸없는 손들을 가만히 미워할 작정이다.

이래서 내가 돈을 못벌지.


2010년 6월 5일 토요일

세상 끝에서도 버릇은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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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고양이는 와다다닥 달려가다가 급제동 후 목 뒤를 세번 핥는 버릇이 있다.
<뭔가에 놀란다 - 발이 안보이게 뛴다 - 갑자기 선다 - 목 뒤를 핥는다> 수순으로 이어지는 연속동작은 연속이라고 말하기가 머쓱해지도록 따로 노는 느낌이다.

어제 고양이와 놀면서 잡을 의지 없이 잡으려는 공갈 모션을 취하자, 흡사 말발굽 소리를 내면서 뚜가닥 뚜가닥 도망을 간다. 그 꽁무니를 보곤 언니가 "세상 끝까지 달려갈 기세다"라고 논평하였다.

나는 세상 끝까지 뚜가닥 뚜가닥 달려가서는 언제나처럼 흠칫 멈춰서서 목 뒤를 세 번 핥을 고양이를 생각한다.


세상 끝따위가 뭐냐. 목이나 핥을테다 !
세상 끝의 의미는 인간따위나 생각하며 시간낭비 하시지 !
꼴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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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정지 이전에, 짧은 시간의 일시멈춤이 있어서 비록 찰나이지만, 세상 끝에서도 여전할 내 버릇이 보이는 순간이 주어지거든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이죽댈 수 있어 기쁠 것이다.
1초 후에 죽는데 김 오십 장을 굽고 있다거나 3분 후 해동이 끝나는 냉동 떡을 전자렌지에 넣고 있다거나 10분 후 다운로드가 끝나는 영화파일을 받고 있다거나.
어절씨구, 저러고 있지 저 양반.

어쩌면 목 뒤를 세 번 핥는 쪽이 차라리 의미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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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동작을 무수히 반복하는 움짤은 세상 끝까지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저 고양이 위로는 영원히 장난감 자동차가 지나갈 것이므로.
니체가 울고갈 영원회귀의 현장 일지도 모른다. 이 말하면 니체 좋아하는 양반들은 나를 싫어하기 시작한다.




2010년 6월 1일 화요일

까페, 계산대_2010. 6. 2.



계산원이 짧은 시간안에 손님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참 많다. 뜨거운 거냐 차가운 거냐, 먹고 갈거냐 말거냐, 그러면 머그컵에 줄까 종이컵에 줄까, 할인카드 있니 없니, 그러면 적립카드는 있니 등등.
과도한 질문을 손님이 도망가기 전에 소화해야한다.

오늘은 "오케이캐쉬백 카드 있으십니까?" 부분에서 계산원이 삐걱했다. 뒤에서 매니져가 쏘아 붙였다. 세트는 적립안되잖아!
계산원 볼이 붉어지면서 나를 보고 머쓱하게 웃었다.

나는 시급의 대가 이상의 무안을 당하는 알바를 보는 순간이 정말 눈물나게 싫다.
회사를 구박할 수는 없으므로 알바만을 구박할 수 있을 매니져를, 나 역시 '종업원'만을 구박할 수 있는 손님이므로 한번 쏘아볼 것인가,를 고민하다, 내가 쏜 눈빛이 알바에게 두 번 이상의 구박으로 튕겨져 나갈 것 같은 생각이 퍼뜩 들었으므로, 산처럼 등짐지고 채찍맞는 노새같이, 알바와 마주보고 힝힝 웃었다.


투표해주세요


설마설마하던 것들은, 큰 사건 앞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태도나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 순간 바로 전까지 나는 여전히 설마설마의 단계에서 머뭇대다가 진짜야? 단계로 가면서 맹렬히 멍청해지곤 합니다.
그리하여 파란매직 1번 앞에서도 설마설마 단계와 진짜 계속 우길거야? 사이에서 머뭇대고 있습니다.

이런 한국은 참 살기 쉽지 않다고 절절히 느끼는 요즘입니다.
차분히 이민을 준비하는 지인들을 보면 저 대열에 끼고 싶다고도 생각듭니다.
제도나 집단이 얼마나 사람을 모욕하기 쉽게되었는지요. 지금 한국, 그리고 서울은 말입니다.
나는 침몰하는 배에서 빠져나가는 쥐마냥 이곳을 도망치고 싶어집니다.

사람하나 살린다 여겨주시어 투표바랍니다.

별의별 욕 다들어도 아무나 붙잡고 투표하라고 하고 싶습니다.


2010년 5월 2일 일요일

생활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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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인가, 한나라당 이진삼 의원이 군 수뇌부들에게 군기강 해이를 지적하겠다며 군번줄, 부동자세, 거수경례 자세 등을 문제삼아 사자후로 일갈하는 영상을 봤다.

일병만 지나도 모욕이 될 저런 말을 소리소리 지르고 있는 장면을 보고 '통쾌하다!'는 수많은 웹상의 반응들에 나는 엷고도 짙은 공포를 느낀다. 이건 생활 공포다.
잘못한 사람은 어떤 모욕을 당해도 상관없다는 것일지.
천안함 침몰에 대한 진상을 밝히는 데에도, 정당하게 책임을 묻는 데에도 어떤 도움도 안될 말을 하는 의원에게는 아무도 '해이' 상태를 발견하지 않는 것인지.
관련 문건을 한번이라도 정독했다면, 스스로 말했듯 과거 군 수뇌부였으면 더 잘 보일 문제점을 지적하지는 않고서는 저런 어처구니없는 모욕적 일갈로 귀한 (나같은 일개 쇤네들은 꿈도 못꿀) 발언 시간을, 쉬이 날려도 괜찮다는 말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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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중한 발언권 같은 것이야 당최 날릴 것이 없고 생활 공포에 지친 이 쇤네는
옥상에서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옵니다.


내장탕과 선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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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과 비평.

이 둘이 부적절한 동시에 매우 매끈한 이음매를 자랑하면서 글 한편 안에 야무지게 동거중이시라면, 비평문도 성인 야동사이트의 무차별 팝업창 폭격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과격함을 자랑하는 광고글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과격한가 하면, 글 잘쓰는 사람이 작정하고 쓴 광고글은 이게 광고인지 일말의 비평적 기준을 지키는 글인지 뭔지 고개를 갸웃갸웃하다 '전문가' 후광에 홀랑 넘어가게 만든다는 것. 트로이의 목마 광고버전이랄까.

어찌되었건 책도 팔려야 살아남는지라 어차피 평할 거, 칭찬이 과해지는 게 무슨 그리 큰 잘못이 되겠냐마는.
칭찬을 구성하는 단어의 인플레이션은 종종 뜨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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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맥락에서 뻔해지는 무엇무엇들에 대해 종종 낄낄대기도 하였던 것이다.

속눈썹, 잘 다린 물빛 와이셔츠, 가녀린 어깨 나오면 섬세하고 트렌디한 필치고
주인공 하는 말이 비몽사몽이다 싶으면 자동기술법이고
밤에 나무 밑에서 목소리가 날카로운 할머니를 만나면 환상문학이고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진흙밭에 구르다가 마지막에 "그래도 살자" 정도 넣으면 무한한 자기긍정,
내장 나오고 피 좀 튀기면 그로테스크.

기타등등 기타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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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읽었더니 비평 아닌 광고글에 가까웠을 때, 나는 항의할 여력도 없이 입만 한대나 나오고 그저 뾰로통해지고 만다.
그리곤 아무 글에서나 등장인물 둘이 갑자기 맥락도 없이 내장탕과 선지국을 와구와구 먹는 장면을 넣자, 하고 목에 여드름난 사춘기 청소년 처럼 삐딱선이나 탈 결심을 잠시. 이래봤자 쓴 놈만 홀로 겨우 낄낄거릴 쓸쓸한 패러디인 것이니. 아 쓸쓸하다 오 가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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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먹고 이렇게 또 악취미만 느는구나.
꼴좋다!


2010년 4월 25일 일요일

깨알같은 선택들


1.

잠자리에 들기 전 마크와 한 말이 생각났다.

"잠에서 깨어나면 맨 먼저 부츠를 뒤집어 들고 흔들어야 하는 걸 잊지 마세요."
"왜요?"
"전갈 때문이죠. 잘 자요."

(더글러스 애덤스, <마지막 기회 Last Chance to see>)


2.
버스에서 한 커플이 자리가 없어 선 채로 있었는데, 남자가 애인의 볼에 뽀뽀를 하면서 동시에 재빨리 신발을 벗어 손가락으로 발바닥을 긁었다.
그 장면을 본 나는 얼어붙었다. 뽀뽀로 애인의 시선을 돌리면서 발바닥을 몰래 긁다니. 충격적일만큼 자연스러웠다. 내 남자친구가 내게 뽀뽀하면서 몰래 항문을 긁더라도 나는 놀라지 않게 될 것이다.


3.
위의 두 경우에서 중요한 것은 선택인데, 왜냐하면 이미 전갈이 나타나는 방에 있는 상황인 것이고, 이미 발바닥을 유연하게 긁는 남자를 봐버린 것이므로.

그저 바뀔 수 있는 것은 "전갈 때문이죠. 잘 자요."를 어떻게 들어넘길 것이냐,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신발을 찾는 순간 비몽사몽간에 전갈에 물리는 일은 피할 수 있겠군,으로 받아들이면 좋으련만, 부츠에서 전갈이 기어나와 몸을 C자로 휘어서는 내게 독을 쏠 상황을 상상하며 밤잠 한 숨 못자는 편이면 애처로운 일이다.
전갈에 대한 언급은 그러니까 확실히 "잘자요"에 핵심이 있다. 불안은 스스로 요리하고 푹 잘 것. 전갈이 나타날 것인지, 그 애가 나를 공격할 것인지, 나는 그 전갈을 설득하거나 회유할 수 있을 것인지는 전혀 내 능력 밖의 문제이므로, 그러니까 전갈의 선택은 전갈에게 맡길 것. 전갈이 자고 있는 나를 공격하기보다 부츠에 숨기를 원할만큼 방어적이고 소심하기를 희망하고, 푹 잘 것.

발바닥을 긁는 남자에게서 애인의 눈을 돌리는 얄팍한 꼼수를 볼 것인가, 그렇게라도 긁어야만 견딜 수 있게 하는, 미치도록 가려운 무좀의 잔혹성을 볼 것인가.

사태는 전혀 못 바꾸지만, 그 상황 안에서 내 마음가짐만 바꿔 조금 견딜 수 있게 되는, 작고 작은 깨알 같은 선택의 문제.



4.
불안을 요리하는 선택까지는 아직 못하고 있으나,
남친이 항문을 긁더라도 놀라지 않을 마음의 준비는 되었다.

작은 성과랄까.


2010년 3월 24일 수요일

눈, 관찰, 알아보기


- 3월에 오는 눈ㅡ 드물다 하면서 매년 내리고 있다 ㅡ에 어떤 쓸쓸함이거나 센치함이거나 좌우지간 애매한 감정이 들어 잠시 사무쳤다. 창문 가까이 발을 겹쳐모으고 누워, 온 시야를 창문으로 채우고 있었다. 눈이, 정말, 많다, 크다,외에도 좌우지간 애매한 감정에, 한참 보았다. 3월의 눈. 학기 마지막에 모든 연례 행사가 끝난 뒤에 슬그머니 전학 온 외국인 전학생을 보듯, 아니 왜 이제서야?

눈이 쌓이는 지점은 언제인가가 궁금해졌다. 바닥을 보고 있으면 내리는 족족 녹아 사라지는데, 어느 순간 눈은 쌓이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그 같은 자리에 몇 개의 눈이 몸을 쳐박으면 그 위로 언젠가 한놈은 살아 남고 그 위로, 또 그 위로 쌓이기 시작하는 것인지.

과도한 센치함이 섞인 관찰인 것도 확실하다.



- 소수의 취향, 마이너의 취향은 누군가가 그 취향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손붙들고 방방 뛰며 반가워하게 된다. 때론 반가움을 넘어서서 어떤 서러움, 오열, 추운 데에서만 늘상 지냈던 사람의 쓸쓸함도 드러난다.

객지에 있는 어디든 맛은 보장된 셈이라 기사식당엘 종종 가는데, 지난 번에 간 곳은, 아주 담박한 맛이 일품인 나물무침이 있었다. 손도 많이 갈 것 같다. 엄만 내가 손이 많이 가는 것만 귀신같이 알고 좋아한다고 말했었다.
깨끗이 싹싹 먹고, 한 그릇 더 달라하며, 이거 참 맛있네요, 했을 적에 식당아주머니 눈빛이 생각난다.
내가 이걸 지방에서 먹어보고, 이 맛이 너무 좋아서 배워갖고 만든 건데요, 드디어 알아보는 사람을 만났네.

똑같은 그릇에, 김치와 콩나물과 두부조림과 어떤 구분도 없이 똑같이 내어 놨지만 그냥 나물이 아닌 것.

눈길 한번, 제대로 된 관심 한 번을 못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 그것을 늘상 응시하는 것.
그러다 '알아 보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 이런 것들엔 '인연' 같은, 꽤나 신비함을 가운처럼 두르고 있는 단어도 어울리겠다.

2010년 3월 20일 토요일

느릿느릿 누릿누릿


- 평소 작업 속도가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 장단맞춰 일등기록으로 내 평균치를 따졌던 모양인지, 속도가 느려 미칠 것 같다. 이러다 답답해서 가슴이 터질거에요, 빵빵.

속도를 좀 높일 참이면, 머리에선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 신호만 깜빡깜빡.


- 어이, 그 곤란한 지금은 언제 끝날거 같소? 하냥, 기다리면 되는거요?


- 어제는 정말이지 하늘이 흙탕물 같았고, 바람불 때 숨을 들이마시면 모래냄새가 났다. 코 안이 써글써글.
3년인지 4년전인지, 황사가 심하던 날, 콘텍트렌즈를 끼고 나갔다가 각막염과 결막염에 잘도 걸려, 다음 날 고름이 눌어붙은 눈이 떠지지 않았던 이후로, 고름에 불어터진 눈을 보고 어메, 저건 물고기여 사람이여, 했던 이후로 황사가 정말 무섭다. 그때 안과에서 처방해준 약의 부작용 중엔 "심신허탈"이 있었다. 무슨 안약이 심신을 허탈하게까지 하는 걸까. 이것도 무섭다.


- 어제는, 정말이지, 전국에서 일제히 초등6학년 언니들이 운동장에서 부채춤을 춘 마냥 모래바람이 일었다니까요.
공기중에 둥둥 뜬, 10의 백제곱, 구골개의 먼지 무리를 무슨 수로 막는다지요. 무섭네요. 무섭네요.



2010년 3월 6일 토요일

죽도록 떠들기

- 도서관 서가에서 차지하고 있는 단순 면적, 책 두께만으로도 사람 기죽이는 작가들이 분명 있으므로 ㅡ 가령 니체라든가, 데리다라든가, 도스토옙스키라든가, 발자크라든가 ㅡ 아니 이사람들은 뭔 할말이 이리 많누 했다간,
글 줄 하나, 문단 하나를 못넘기고 끙끙대는 소심한 작자는 결국 조금 부러워진다.


도스토옙스키는 낭독법으로 글을 썼다고도 하고, 발자크는 빚쟁이 피해서 위장에 커피를 들이부으며 썼다고도 하고. 저 두꺼운 책 앞에서 자못 궁금해진다. 저 양반들, 대체 자기가 쓴거 다 읽긴 하는걸까. 친구의 대답은 ㅡ 읽을 시간이 어딨어, 빚쟁이 오는데 얼른 쓰고 도망가야지.


- 결국 입심 딸리는 무산자의 글쓰기를 독려하는 것은 채권자의 협박뿐인가.

입심은 딸리는 채로 채권자만 남아 하냥 달리기만 는다면. ㅡ 이런 그림은 퍽 암울하다.



- 아무리 짱구를 굴려도 글은 비루하여, 소심한 작자는 이렇게라도 입을 가벼이 하는 연습을 한다.



2010년 3월 5일 금요일

오한과 발열 사이



- 몇몇 장면들은 신경을 에누리없이 곤두세워 안면없는 사람에게라도 일갈하고 싶어지게 한다. 가령, 버스에서 어린 애가 대강 앉아있는 걸 나몰라라 하고 딴 곳에 앉아있는 부모라든지, 횡단보도 앞에서 애들이 까불까불 몸을 흔들어대는데 잡고 있을 생각도 안하는 부모라든지.

애들은 대강 앉는 게 어떤 건지 확실히 보여주므로 한순간만 눈을 돌려도 손잡이에 머리를 꽝 박고, 등받이에 머리를 꽝 박고, 기둥에 머리를 꽝 박고, 바닥에 내던져져 구르다가 머리를 꽝 박을 수 있다. 하필 내 옆에 앉은 애가 대강 앉아 있었고, 부모가 나몰라라 건너편에 앉아 신경도 안썼고, 나는 일갈의 욕구를 이를 덕덕 가는 데에나 쓰다가, 급정차 한방이면 애가 바닥에 나뒹굴다 머리를 꽝 박을 영상이 가시질 않아 내 자리로 애 엄마를 앉게 했다. 자리를 옮겨 앉다가 애 대신 내가 의자 손잡이에 착석해 버렸는데, 그때 이후로 허벅지 뒷쪽에 주먹만한 보라색 피멍이 여직이다. 그래서 여직 이도 덕덕 갈고 있다.


- 불안이 고질병으로 번질 때면, 미래의 온갖 '최악의 시나리오'를 작성한다. 사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온 하루를 치욕 사건이 점철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모든 선택들이 나를 배반하여 완전히 궁지에 몰리는 미래의 어떤 날을 그려보고 널부러진 마흔 쯤의 나를 보며 한숨을 폭폭 쉰다. 나는 이런 능력은 좀 있다. 과연 쓸데는 없는 능력이다.


- 말 한마디로 불안이 증폭되게 했다는 사유로 남친에게 딱밤을 약 5대 때렸다. 오, 누가 처음부터 뺨을 치려 했겠는가, 시작은 누구나 이렇게 (귀여운) 딱밤정도인 것이다. 나는 더욱 폭력적으로 변질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나 이런 능력 있다고 이미 말했다)


- 그저 '지금'을 살라는 말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아서 늘상 정수리 위엔 미래의 숱한 마이너리티 리포트들이 너울너울하다. 나는 하냥 오한과 발열 사이를 오가며 불안해한다. 모골이 송연해졌다간 열이 풀풀 났다간.


- 근데 넌 대체 뭘 할려고 이지랄이여, 이지랄이.




2010년 2월 13일 토요일

아파트 놀이터_2010. 2. 13.


- 완전히 어두워졌는데 가로등을 햇빛 삼아 놀이터에서 밤늦도록 애들이 뛰어놀고 있다. 명절엔 부모들의 감시가 느슨해지니 그럴 수 있을 테다. 원통으로 구불구불하게 설치된 미끄럼틀에서 애들 얼굴이 벌개져서 쉴 새없이 미끄러져 내려오는데, 아, 애들은 철로 된 미끄럼틀이 살에 닿으면 추웠는지 엉덩이에다 코트나 점퍼를 깔고 뭉갠 채 미끄러져 오고 있다. 엉덩이도 안시렵고 쿠션감이 든든한 미끄럼 썰매 완성이다. 영리하다.


- 쟤네들 엄마가 보면 혀를 끌끌 차거나 혈압 높은 어머니는 달려나와 등에 스파이크를 먹일 지도 모른다. 옷이 귀하던 시절을 산 사람들은 안시린 엉덩이보다 망쳐지는 옷이 눈에 먼저 밟히니까. 하지만 나는 쟤들 엄마가 아니라서, "영리하다"고 생각한다.


- 엄마 눈을 피해서 내 옷을 망치는 것. 그 선택으로 엉덩이가 시렵지 않게 미끄럼을 타는 것.
어째 내가 줄곧 하는 행동 패턴과 비슷하다. 온갖 방식으로 엄마의 눈을 피해, 망치는 선택들을 하고, 그 선택으로 몇몇 미끄럼을 엉덩이가 시렵지않게 탔고, 종종은 망친 옷을 보며 한숨을 폭폭 쉬기도 하나, 도무지, 밤이 늦도록 가로등을 햇빛 삼는다 해도 미끄럼은 멈출 수 없는 상태랄까.


- 옷은 또 있을 테니까. 엉덩이가 시려우면 미끄럼을 오래 못타니까. 엄마한테는 비밀로 하면 되니까.

2010년 2월 9일 화요일

마트, 계산대, 중년남자_2010. 2. 6.

 


 


대형마트 계산대에서 내가 고른 물건들을 풀어놓을 때, 작은 서류함을 든 중년 남자가 꽤 오래 계산원을 붙든다. 뒤에 선 내가 계산을 끝내고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을 때까지 그가 한 말은 같은 내용의 반복이었다.


 


 


"이거, 이러면, 현금영수증, 아니 그, 연말정산, 소득, 그거 공제 되는 거, 이러면 되는 거죠?"


 


 


다 된거다, 그러면 문제없다, 반복해 이야기해도 그는 재차, 조금씩 단어 순서만 달리해서 같은 질문을 했다. 나는 계산원의 표정에 묘한 당혹, 어쩌면 조금의 공포, 감출 수 없는 짜증, 그러나 임무를 띤 미소가 엎치락 뒤치락 하는 것을, 화난 엄마 얼굴을 살피듯 초조하게 곁눈질했다. 중년남자는 계속 웃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덧붙인 한 마디로 짐작이 되었다. "제가 일이 없다가, 요번에 자리를 잡았거든요, 그래서요, 이거 이러면, 공제 그거 되는거죠?"


 


 


축하한다,는 말을 원했을 거라 짐작한다. 일면 없는 계산원에게라도, 잘됐네요,를 듣고 싶었을 거라 생각한다. 내 이런 짐작이 폭력적일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계산원도, 나도, 그말은 하지 않는다. 남자는 싱글벙글 꾸벅꾸벅 인사하며 서류함을 들고 착착 걸어간다.


 


 

2010년 1월 28일 목요일

이승이라는 똥밭, 방울뱀



산 세월이 적을 수록 죽음에 이끌리는 충동이 강하다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10대 시절의 몇 가지 고민은 지들끼리 몸을 섞고 다시 한 덩어리가 되어 경계 없이 커다래져버렸으므로, 몸을 불리는 고민들을 보고 있자면 어안이 벙벙하고 암담하기만 했던 것도 같다. 결국 따져보면 집구석이 싫다는 것이었는데, 이런 집에서 나가기란 얼마나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인가, 돈은 얼마나 필요하며, 어른 타이틀을 얻을 때까지 어떻게 버틸 것이며를 계산하다간, 그 모든 것은 너무나 요원하고 멀리멀리 가물가물 하는 것이므로 아뜩한 마음에, 에라이 죽어버리자, 했던 때도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것들이 이미 지난 일이라, 그대로 지날 수 있던 일이라, 다행이다.


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란 소린 똥밭에 안굴러봐서, 똥독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하고 입이 댓발 나오고 심통이 날 적엔 종종 내세라는 것, 그러니까 조금도 내 소망이 반영되지 않은 내세를 상상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내겐 그 내세의 형태가 방울뱀의 삶이다.


카프카는 잠들었다가 문득 일어났을 때 갑충이 된 <잠자>를 그렸지만, 나는 그 불행의 무한대의 형태로 많은 다리와 딱딱한 갑피만큼 곤란한 것이 있다. 걸음 대신 배밀이로 바닥을 훑고 다니는 비늘류의 피부를 뽐내는 레알 뱀눈깔의 방울뱀.  산 속에 온 사람에게 뭔가를 전해보려 고개를 세우면 공격태세로 알 것이며, 어이쿠 공격하려는 게 아닙니다,라 전해보려 입을 벌리면 우리엄마조차 아무리 애써도 예뻐보이지 않을 것이며, 샤샤샤샤 하는 혼신의 소리는 상대를 공포 상태로 몰아넣을 것이다. 게다가 사회에 쌓인 것도 없이 일평생 '독을 차고'다녀야 하다니. 오오, 방울뱀이 되기 전에 아무 말이나 많이 해버리지, 싶어진다. 말이며 글이란 것이 아무리 오해란 것과 도저히 헤어질 수 없는 불륜관계에 있다 해도, 방울뱀보다는 많은 말을, 오해와 이해 사이를 기웃기웃대며 많은 말을 했으면 싶어진다. 신발을 신을 다리도 두 개나 있으니 고무밑창 떨어지도록 걷고 걷고 걷자 싶어지는 것이다.
(신발을 한 켤레만 사도 된다는 점도 꽤 다행이다. <잠자>는 그 많은 다리에 신을 신발이 없어서 방에서 죽은 것일지 누가 알랴.)



위의 방법은 각자 사정과 취향에 따라 방울뱀의 자리를 아메바, 플라나리아, 황소개구리, 부레옥잠 등으로 채워 쓰면 요긴할 것이라 생각한다. 좋아하는 생물은 아무리 넣어봐야 이승의 똥독을 참는 데에 별 도움이 안된다.


2010년 1월 19일 화요일

신선 놀음



손발을 재게 놀려가며 홀서빙도 주방 설거지도 못하는 나는, 엄마 일을 도울 수 없다. 허생원 코스프레로 책상 앞의 7년을 지켜가며, 어허, 10년을 채우려했거늘!하며 괜히 버럭댈 수는 없어 늘상 우는 소리나 한다. 어떤 생산활동도 결핍된 생활들은 가히 누군가의 노동으로 연명되는 신선놀음이라, 나는 어떤 종류의 죄책감에 시달린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표현을 떠올리니 까진 무릎에 소독약을 부어 부글부글하는 걸 으악, 따가워 하며 묘한 쾌감으로 보고 있는 기분이다. "그는 못됐다. 그는 감상적이었고 또 못됐다." 감상적인 동시에 못된 인간. 부빌 언덕에 기대고 살 것이면 뻔뻔하게, 신선놀음도 뻔뻔한 편이 낫지, 눈물은 눈물대로 흘려가며 정작 신선놀음은 멈추지 못하는 형국이라니. 이 순간 감상적이고 동시에 못된 인간은 으악 따가워 하며 상처에 부글부글 소독약을 조금 더 붓는다.


까진 무릎에 빨간약을 바를 시간은 언제인가. 딱쟁이를 어서 얹고 밖에 나가 신발신고 놀 시간은 언제인가. 뒷통수 뒤로 어미 얼굴을 잊고 전봇대에 고무줄을 매어놓고 진땀을 빼며 해지도록 놀 시간은 언제 오는가.



2010년 1월 1일 금요일

순발력 결핍자


대학에 가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내가 특별히 수강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체육시간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애물 달리기 따위는 언제나 나를 위축시켰다. 뛰기나 넘기, 둘 중 하나만 시켜도 심란한데, 뛰다가 갑작스레 나타나는 장애물(아무리 쳐다보며 뛰어도 장애물은 늘 급작스레 나타난다)을 뛰어넘을 도약점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신비에 가깝다.


어떤 종류의 순발력은 체육시간이 아니더라도 나를 좌절시킨다. 가령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을 건널 때, 좌우를 확인했음에도 갑자기 차가 돌진하면 나는 매우 재빠르게 그냥 몸이 굳는다. 쇤네, 몸값도 헐값입니다, 치고 가시오. 공이 날아 올 때 눈을 감는 속도에 버금가게 그저 길 한복판에 멈춰서는데, 이건 개체수가 급격히 줄고있는 멍청한 초식동물같다. 위험 앞에서 피하기보다 몸이 굳는 편이 속도가 빠르다니 세포 하나하나까지 게으른 느낌.


그러니 년도 끝수가 9일 적마다 잘 나오는 재난영화에 늘상 등장하는 민폐형 캐릭터가 될 것이 분명하다. 뒤에 파도가 들이닥치는데 전선 따위에 걸려넘어져 "먼저가" 같은 도움안되는 말만 하는 인물. 그래서 생각건대 나는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갑판으로 앞사람을 밀치며 달려가는 사람이느니 우리 마지막 연주를 합세, 하며 차오르는 물을 보며 바이올린을 켜는 악사이길 바라는 것이다. 이건 품위를 지키는 것으로 포장한 순발력 결핍자의 꼼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