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2일 일요일

한기, 더부룩함_2009. 11. 22.

 


 


무시하기엔 좀 성가시게 내리는 비를 우산없이 맞고 돌아오는 길에, 얼굴과 머리털 위에 흩뿌려진 빗방울의 감촉이 낭만적이라기엔 을씨년스러워 가을도 넘어선 겨울인가 하는 뻔한 생각을 하며 편의점에 들렀다. 편의점. 화개장터 이후로 엄마 아버지만 빼고 있을 건 다 있는, 24시간 지나치게 환한 이 곳. 환한 조명 탓인지 편의점 거울은 사람 유난 초췌하게 보이는 기능이 엘리베이터 거울 다음급은 된다. 눅눅해지고 죽죽 빗금이 간 저 얼굴은 누구냐. 거울 속에 흔들리는 내 눈을 내가 피하며 컵라면 몇 개와 주전부리용 과자 두어 봉지를 사들고 나왔다. 신호등 불을 기다리며 선 건널목에서 한산한 도로를 부앙 하고 달리는 자동차가 바람을 일으키고 지나가자 한기가 선뜻한 것이 감기면 곤란하다, 생각한다. 돌아와서 소변을 보니 오줌이 뜨겁다. 소변이 뜨겁게 느껴지는 것은 몸살 감기의 자가진단 1단계이다.


 


 


목에 수건을 두르고 잠을 청하려는데 낮에 과하게 먹은 돈까스와 컵라면의 잔재가 배 안을 휘집고, 속이 가히 좋지 않다. 이런 더부룩함은 글을 끄적거릴 때 약간 성가신 편두통처럼 나와 애증의 관계를 맺고 있다. 증은 알겠는데 애를 할 건 무어냐, 더부룩함따위를? 여보게, 리듬과 정량에 대한 감각을 잊어 그렇다네. 채 씹지도 않은 입안으로 와구와구 숟가락을 놀리면 더부룩하지. 위란 것은 자네 주먹만이나 한데, 와르르 쏟아넣으면 탈이 날밖엔.


명치께를 연속하여 쓸어내려봐도 가스는 트름으로도 아래 방귀로도 안나오고 가운데츰을 가만히 누르고만 있다. 이 느낌이 마냥 괴로운 것은 아니다. 점심무렵 바삐 놀린 숟가락 건너편의 인물과의 시간이 기억나는 것이니, 자학적인 방법이나마 회상의 도구라고 여겨나 보자. 물론 이건 이 나이 먹드룩 체하지 않게 밥도 제대로 못먹는 나를 벌하지 않기 위함이다. 걔좀 고만 혼내, 주눅든거봐.


 


 

2009년 11월 5일 목요일

과일이 구르는 버스_2009. 11. 3.


1.
지난 달 시청부근으로 가던 길에, 추석 즈음이었으니 가판에 마저 팔지 못한 잘생긴 과일들이 많던 그 때였던지라 버스에도 아기 머리통만한 누릿누릿한 배를 비닐봉지가 미어지도록 들고 탄 부부가 있었다.

어디 멍든 데도 없이 배가 참 실한데, 싸게 잘 주고 샀어,의 구매후기를 주고 받던 그 때, 버스의 급정차와 관성의 법칙과 야박하게 작은 비닐봉지가 한데 어우러진 참사가 일어났다. 배 예닐곱 개가 버스 바닥에 와르르 구르기 시작한 것이다. 참하고 실하던 배들은 옆구리를 찧어가며 버스 속도를 맞춰 바운딩을 해댔고, 아줌마와 아저씨는 으메 으째쓰까 하며 배를 잡으러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다음이 목적지라 버스에서 내렸는데 내릴 문이 열리자 나를 따라 배 하나가 같이 내렸다. 내 발 옆에 내린 배를 집어들었더니 그 곱던 배 뒤통수가 폭삭 깨져있다. 뇌진탕 배는 주인아저씨에게 "얘가 저랑 같이 내렸어요"하며 건내주었다. 약속장소로 향하는 내내 계속 배즙이 손에 묻어있었다.


2.
엄마 집에서 반찬을 배급받아 돌아오던 길. 나는 버스에서 늘 그랬듯 정신줄을 놓고 목이 부러져라 잠든다. 차가 크게 커브를 돈다고 느낄 때, 발밑에 두었던 반찬 바구니에서 내일 아침에 먹으려고 싸온 사과 한 알이 데구르 굴러 저 건너편에 나처럼 목을 꺾고 졸고 있던 아저씨 의자 밑으로 도망가버렸다. 나는 저 사과를 구하러 아저씨 의자 밑으로 기어 들어가야할지, 아저씨를 깨워서 사과 좀 줍쇼,해야 하는가를 난감해하고 있었는데, 버스가 다시 커브를 크게 돈다. 사과는 툴툴대며 다시 내게로 굴러왔다. 사과와 눈물의 상봉. 사과의 수평진자운동을 보고 있던 맨 뒷자리 청년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2009년 11월 1일 일요일

통하였느냐



동물과 함께 살 때, 교감하는 순간에 느끼는 감격과 보람을 동거의 동력으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생각해보면 그런 경우란 너무도 기나긴 고회의 시간 끝에나 온다. 어떤 사탕이 죽여주게 맛있다고 들었고, 아직 콩알만큼을 시식해보았을 뿐인데, 다음 사탕을 먹게되는 순간이 9년 후라는 말을 들은 것과 같이 사지가 조금 허탈해지는 것이다.


오히려 감격스러운 것은 '아, 얘랑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구나'에서 온다. 고양이 발을 붙들고(이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나는 니가 잘 놀다가 갑자기 발톱으로 나를 긁는게 싫거든, 그러지 좀 말자,라고 아무리 간곡하게 부탁해도 고양이는 눈을 모로 세우고 손을 긁고 사라지는 순간처럼. 말의 영역이 조금도 먹혀들지 않는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 꽤 각별한 것이다. 내 고양이와 나는 교감과 화합의 순간으로 수렴할 필요가 없다. 하면야 좋겠지만 애써 화합과 평화를 이마에 붙여두고 눈치보지 않아도 괜찮다. 각자의 구석에서 서로 노려볼지언정, 어떤 상대와 말이 지독하게 안통하는 경험은 필요하다. 말이 안먹힐 때 어떤 것은 감내해야하고, 어떤 것은 포기해야 하며, 사실 이런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니 스트레스는 덜 받는 편이 좋다는 것도.
우린 어쩔 수 없어,식의 냉소하는 버릇만 끼어들지 않는다면 얻을 것이 많다.



2009년 10월 21일 수요일

청소


방청소는 죽기 전까지 깨우칠 자신이 없는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깨끗한 방이라는 이데아는 신비의 강 쯔유쯔유를 넘어 저 멀리에 있는데, 나는 하냥 동굴 벽의 그림자를 "와 재밌다"하고 감상하는 지경이다. 청소를 한 지 3주쯤 지나고 내가 오르내리는 계단에 슬슬 먼지 발자국이 찍히기 시작하면 드디어 청소를 할 때인가,하고 할일 리스트 155번에 체크해두는데, 나는 할일 리스트 1번을 일년 내내 시작만 하는 사람이므로 155번은 마치 정원 20명의 지원 대학 학과 예비합격자 1155번이나 마찬가지, 아 그러니까, 늘상 "접자"는 쪽으로 그치고 방안은 카오스가 되어간다.


극적으로 방청소를 결정하고 호기있게 널린 이불을 개켜 한쪽에 치워두려는 사건이 생길 땐 늘상 이불에 붙은 무수한 고양이 털을 발견하는 수순을 밟는다. 이대로 이불을 개켜둔다면 바닥을 아무리 쓸어도 소용없을 것이라며 이불을 툭툭 터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다는 듯 쭈그려 앉아 깨작깨작 테이프로 고양이 털을 떼어낸다. 이때 잊어서는 안될 문장 하나. "당신이 아무리 긴 테이프를 갖고 있다해도 고양이 털을 모두 제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와 고양이털과 이불만 우주에 남겨진 양 귀도 닫고 털을 떼다 하루가 간다. 그리고 다음 날은 방청소가 다시 리스트 155번에서 가물가물하게 깜빡이는 것이다.


기적적으로 다시 방청소를 시작하는 다음 날이 있거든, 창문 근처에 펴둔 빨래건조대를 접어 한켠에 두려다 건조대의 알루미늄대가 형편없이 휘어 도저히 접히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하고 구겨진 살을 펴보려 용을 쓰다 손을 다친다. 이렇게 피를 보고서는 도저히 방을 치울 수 없다며 손을 싸매고 마음이 상해 돌아눕는 것이다. 옷장을 정리하자면 이 옷은 버릴까 어쩔까를 꼭 입어보고서야 결정하는데, 그러다보면 유행이 몹시 지난 옷들, 몸에 비해 작아진 옷을 입고 한참 바보 흉내를 내고, 탈춤을 추고, 가급적 그 옷이 웃겨보이게 온갖 포즈를 취하는데 각 옷마다의 공연시간은 짧게는 1분에서 길게는 10분, 관람자인 동거인 언니가 웃음이 빵빵터지면 연장공연도 불사. 이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가까스로 계절옷/ 기증할 옷/ 버릴 옷으로 구분한다.  옷장의 2/3이 비었을 무렵, 어느 순간부터 구분을 반대로 해두고 있었음을 발견하고 의욕을 상실한채 다시 꺼낸 옷을 전보다 더 카오스 상태로 옷장에 밀어넣기 시작한다. 옷장이야 저 혼자 정글이 되건 말건 책장을 치워보자 하다간, "어머나이책도있었어-무슨내용이더라-우왕굿재밌네-다시읽어볼까-(이것도인연이지)"를 무수히 반복한다. 청소하던 작자는 수북하게 쌓인 책 위에 걸터앉아 죙일 읽고 앉았는 것이므로, 방을 깨끗이 치우자는 종전의 목적은 어디로 가고 나는 방바닥에 책으로 된 종유석 기둥만 똑똑 만들고 새벽이 되어선 심장마비라도 온 사람처럼 책더미 위로 쓰러지며 잠이 든다.


늘상 주변이 이런 고로, 이불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정도, 책이 무게 중심을 뽐내며 쌓여있는 정도가 적당히 유지되어야 마음이 다소 편하다. 그렇다고 먼지 하나 없이 반듯하게 청소된 타인의 방에 가서 아노미상태로 인한 두통을 호소하지는 않는다. 나한테 방청소를 강요하지 않는 한, 타인의 깨끗한 방을 함께 누릴 뻔뻔한 낯짝을 가지고 있으므로 고약하게 일부러 어지럽히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방을 일부러 어지럽히지 않는다면서 왜 내가 3일만 지낸 곳이면 카오스의 방이 되느냐 물으면, 내가 그걸 몰라 방이 이모양입네다, 하고 대답할밖엔.



2009년 10월 15일 목요일

싸워도 이 말만은_2009. 10. 7.


내 옆자리에서 바짝 붙어 부비고 있던 연인이, 쇼파 자리가 나자 그리로 옮겨가 마주앉더니 이내 언성을 높여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면 싸움은 측면보다 정면에서 많이 일어난다. 상대와 바싹 옆에 붙어앉아 싸우기란 동네싸움 40년 경력의 한남슈퍼 아줌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당장 대답을 해내라며 남자를 닦아세웠고 남자는 씩씩대며 듣더니, 나도 내 생각이 있어, 라는 한마디만 이를 악물고 뱉어냈다. 여자는 대체 그 생각이 뭔데? 생각은 하고 살아? 라는 말로도 성이 차지 않는듯 끝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거대한 어망 같은 한 마디를 던진다. "넌 늘 항상 그런 식이야."


여기서 '그런 식'은 결코 어떤 식인지 정의되지 않은 채, 남자의 행동거지 일체를 빈정대며, 남자가 아니라고 하든 맞다고 하든, 남자는 항상 '그런 식'인 사람으로 바코드가 찍힌다. ("삑, 몹쓸 놈입니다") 남자는 자신의 운명을 알아챈 듯 그저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꼬장꼬장하게 팔짱을 끼고 있던 여자는 남자의 말문이 막힌 것을 승전보로 듣고선, 더욱 의기양양하여 목소리를 높여 까페 안 모든 사람에게 남자의 잘못을 까발리고 있었으므로, 나는 이런 싸움의 증인이 되어버린 데에 어랍쇼, 이런 소릴 다 들어버려 죄송합니다, 뚫린 귀라 어쩔 수 없네요, 라 웅얼거리며 난감해하고 있었는데, 그때 저 건너편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잠깐의 눈 마주침으로도, 그녀 역시 난감해하면서 싸움의 증인석에 선 것을 느꼈는데, 그러고 보니, 저 연인을 둘러싼 이 곳이 탈춤 혹은 거리극 마당은 아닌가 싶어진 것이다. 정녕 여자가 원하는 것은 공개심판인가.


그러고 보면 요즈음의 까페는 종종 이러한 자발적 공연들이 자주 열린다. 관객은 그 주변에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결성된 난감해하는 몇몇의 우연적 그룹으로 조성된다. 이 그룹의 탈퇴는 자리를 옮기는 절차로 해결되나, 도서관 대용으로 까페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암묵적이고도 치열한 자리싸움을 알고 있다면, '시끄러우면 옮기지'와 같은 말이 얼마나 섭섭하게 느껴지는지 짐작할 것이다. 


2009년 10월 9일 금요일

좀 그렇다

 


 


오바마의 수상 소식을 접한 후 남친님은 '그래, 인류가 매년 걸출하게 평화로운 일을 하긴 힘들어요'라며 전화로 간단 평을 남겼다. '선리플 후감상'도 아닌 '선수상 후선행'인가. 평화 유망주에게 기대하는 마음은 "혹시 너라면"인데, 선 수상 소식을 들어버리니 "아니 너까지"이다. 입김은 창문 닦는 데에만 쓰면 좋겠는데, 이렇게 너무 불어넣으면 좀 그렇다. 나는 미국만치롱은 힘없는 입김따위 우리집 화장실 거울에 하악 불어서 "세례명 피쓰"라고 손가락 필기로 이죽거릴 예정.


 


 


 


 

2009년 10월 4일 일요일

구지가 (狗旨歌)

명절이나 연휴같은, 집을 좀 비울 일이 생기는 시기면, 사람 외 동물과 함께 사는 경우는 응당 녀석들이 걱정이 되기 마련이다. 이때 그 걱정의 방향이라는 것이 적어도 개와 고양이의 경우가 조금 다른 것을 일경우나마 목도하게 되었는데,


 


 


가령 우리집엔 고양이가 살고 있고, 이놈은 사람이 있을 땐 서먹서먹하게 본둥 만둥 지내면서도, 사람이 집을 비웠다가 들어오면 그리 구슬프게 울며 발광이다. 그 울음소리란 것이 어찌나 원망이 섞였는지, 그러고도 주인이냐, 이렇게 방치하는 주제에 어디가서 얘기할 땐 퍽이나 반려동물이다, 먹이만 부어놓고 가면 장땡인 줄 아느냐, 하고 귀에 쟁쟁하게 번역되어 들리곤 하니, 이번 추석에도 엄마 집으로 향하면서, 저 녀석 때문에 뒷통수가 뜨끔하고 입맛이 쓴 것이다. 이때의 쌉싸래한 기분은 녀석을 외로운 상태로 방치해 두는 것에 초점이 있다 한다면,


 


 


큰언니는 개를 키우는 고로, 늘상 걱정은 녀석이 외로운 것보다 훨씬 가시적이며 물리적인 것에 포커스가 맞춰진다. 친척 모임 후 한밤 중 집에 들어선 언니네 일가는 개똥 무더기 11개와 오줌자리 13개를 발견하고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이 알렸다. "이곳은 아비규환입니다!" 네 식구가 분뇨의 흔적을 치우고 다닐 때, 그집 개는 꼬리를 가랑이에 감추고 눈치를 실실 보며 달달달 떨고 있었다. (개의 긴장상태는 후폭풍에 대한 예상을 어느 정도 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의 분노의 배변활동은 대체 무슨 수로 이해한단 말인가, 너무 무섭지만 나는 쌀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개니까요, 정도로 짐작될 낑낑거림이 전화선 너머로 들려온다) 형부는 화를 넘어선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지금 기분이라면 당장 이 개를 구워먹을 수도 있겠어"라고 하는 상태라, 개의 안위를 지켜줄 수 없는 전화선 끝의 나는 멀찍이 걱정하며 구지가(狗旨歌)를 불러줄밖엔 없다. "푸들아 푸들아 똥오줌을 가려라 / 만약 계속 지리면 구워먹으리"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우리 집엔 똥이나 오줌 흔적은 단 하나도 없었으므로 고양이의 청결한 배변생활을 입맛돋는 간식과 목긁어주기로 치하하고 싶었으나, 반가운 내 맘과는 달리 외롭고 섭섭한 고양이는 할 말이 무척 많아 2시간을 넘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연설을 들어주는 기미가 없으면 즉각 화장실로 가서 목을 놓아 우는데, 언니와 나는 왜 녀석이 행하는 곳이 하필 화장실인가에 대해, 에코가 좋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2009년 9월 23일 수요일

무력함의 얼룩

외할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광주로 향했다. '호상'이라는 것. 늙어 병들어 자식들 고생시키지 않고, 적당히 많은 세월을 겪어내다 돌아가는 것. 옆 분향소에 화재로 죽은 부부가 있었고, 때문에 더 호상이다 싶었겠으나, '호상'이라는 말은 자식들 입에서 나오건 지나가는 입에서 나오건, 섭섭할만큼 냉정한 구석도 있다. 그럼에도,


 


한참을 흐느끼다가도 오며가며 하는 농담에, 온 일가가 모인 자리에선 응당 쏟아져 나오는 자식자랑들에, 와르르 웃다가도, 또 끼니에 밥 한 술 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사람들은 감정의 이 끝과 저 끝을 비틀비틀 흔들리며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다. 이 끝은 응당 당연하고, 저끝도 비틀거리나마 파도처럼 오갈 수 있는 것은 '호상'이어서겠지. 아니, 그럼에도.


 


장례식장은 온전한 무력함을 느끼는 공간이다. 망자와 가족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끝과 저 끝을 비척대며 애도의 과정을 찬찬히 걸어가는 것만을 한다면 할 수 있다. 엄마의 삼베매듭이 꽂힌 푸석하게 흩어진 머릿무새가 마음을 찔러, 바쁘게 일손만 도왔다. 상여소리를 들으며 장지로 향하던 길엔 노자돈을 실랑이하느라 멈춰서는 중마다 쏟아지는 햇빛아래 원숭이처럼 주르륵 붙어서서 앞 사람의 검은 상복 위에 붙은 먼지만 살살 떼어주곤 했다. 문객에게 대접하던 육개장 국물이 튄 자국은 손톱을 세워 긁어도 가루만 날리고 얼룩은 가시지도 않았다. 봉긋하게 솟은 봉분을 보던 그 때, 땀에 절은 상복이 등판에 달라붙어 있던 느낌을 따로 새겨둔다.


 


 

2009년 9월 18일 금요일

전단지 아주머니_2009. 9. 18.


교차로 건널목의 신호등이 번갈아 켜지는 길에, 한 아주머니가 전봇대 뒤에 커다란 쇼핑백을 기대 세우고, 그 안의 전단지를 한뭉치 집어든다.  곧 길 한가운데로 선다.

퇴근시간이라 말쑥한 차림의 직장인들이 이쪽 저쪽으로 무리지어 많이도 오가는데, 아주머니 손에 전단지가 당최 줄지를 않는다. 아주머니는 부끄러운지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전단지를 선뜻 내밀지도 못하고 시선만 흔들흔들하며 서있었다. 숙달된 전단지 배포자는 커다란 길에서도 유능한 골키퍼처럼 좌우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살짝 막아내, 그 손아귀에, 그가 받을 맘이 있건 없건 가차없이 전단지를 찔러넣는 뻔뻔함이 있다. 이 아주머니는 그러기엔 너무 수줍다. 저게 지금 뭘 내밀고 있는 건가 싶게 살짝 종이를 들어 건네보나, 행인은 아주머니를 밀쳐내듯 지나간다. 갈수록 쑥스러운 듯 그저 발끝만 탁탁 바닥에 꽂는다.

어차피 전단지를 나눠줘야 할 살림살이라면, 저 아주머니가 좀 더 빨리 뻔뻔해지는 것이 나을 것이다. 사람들은 전단지 아주머니의 얼굴 따윈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 괜한 전단지 한 장에 자괴감이며 부끄러움을 담고 서 있지 않기를. '못하겠으면 관두지'라는 말은 못하겠으면 관둬도 될 형편의 사람에게나 쓸모있다.

부동산이 많던 길_2009. 9. 17.

뉴타운이니 재개발이니 말이 많은 곳이라 부동산이 무척 많다.

ㅡ 로또 부동산, 부러나 부동산, 한몫 공인중개사.

이런 편이 차라리 낫다. 땅이나 건물을 부지런히 알아보고 매입하는 것은 당연히 로또 맞은 듯한 돈벼락을 위해서이고, 내 재산이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는 모양을 보고 싶은 것이며, 한몫 잡아보자고 하는 것이라고.

저런 곳에서는, 저는 땅과 집을 '사랑해서' 많이 사둡니다,와 같은 심신허탈해지는 기만의 말은 안할 것이다, 적어도.

2009년 9월 16일 수요일

기분전환

스모키 아이 메이크업으로 기분 전환을 해보세요, 보습 미스트는 건조한 오후에 확실한 기분전환을 해줄 거에요, 라는 잡지 문구가 보인다. 우울한 날엔 속눈썹을 붙이고 과한 화장을 한다는 지인 B양이 있다. C양은 매장 직원을 괴롭혀가며 쇼핑을 하고 나면 우울한 것이 한결 좋아진다고 했다. 기분전환의 세계.

뭘 자꾸 전환하라는 건지 새삼 심통이 난다. 우울한 감각을 유지해야한다던가, 늬들이 말하는 건 다 개수작이니 집어치우라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기분전환이라는 말에 담긴 곤궁함에 신경이 날카로울 뿐이다.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테니, 각자 기분이나 바꿔보죠, 가을 색의 그윽한 눈매로, 촉촉한 피부표현으로, 엣지있는 패션 아이템으로, 어때요.

기분전환을 종용할 때, 무던히 기분만 전환해야하는 인간도 있으며, <만병통치약-기분전환>이 듣지 않는 내성이 발성할 때, 도무지 전환될 수 없는 무력감에 휩싸인다는 것도, 좀 알아주었음 하는 것이다. 붙인 속눈썹을 떼내고 티슈를 검게 물들이며 화장을 지울 때 B양은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곤 한다는 것과, 쇼핑백이 자꾸 무거워지는 것은 그저 오래 돌아다녀서가 아님에 한숨을 내쉴 C양의 귀가길을 생각하면 특히 그렇다. 저 잡지 기사를 쓴 기자에게 이런 소릴하면, 과도하게 편향적인 시선으로 보시네요, 스트레스는 안티에이징의 적이니 기분전환 좀 하시죠, 할 것 같아 무섭다.


2009년 8월 31일 월요일

버스, 부엉새_2009. 8. 31.

부엉, 부엉새가 우는 밤, 부엉 춥다고서 우는데, 열두 시가 되면은 문을 닫는다.


 


-_-


오늘은 종일 노래가 요따구로.


 


부엉이가 춥다고 춥다고 우는데, 다들 열두 시라며 문을 닫는다는 각박한 현장을 포착한 기분.
추운 부엉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냐, 문을 닫아야만 사람은 간밤에 신종플루를 안걸리고 면할 수 있느냐, 부엉이는 부엉이고 살 사람은 따뜻하게 살아야지,를 생각하다, 이게 무슨 얼간이 같은 생각이람,하다간, 감사합니다,하고 추가요금 200원을 찍고 버스에서 내린다. 몇주씩 고민하다 산 중고 신발 끝을 쳐다보다가 꽤 마음에 들어, 춥다고 우는 부엉이도 열두 시에 닫히는 각박한 문도 잊어버린다. 과년한 얼간이.

2009년 8월 29일 토요일

이른 아침의 귀가길_2009. 8. 28.

 


첫차가 다니기 시작하고서도 한 시간은 넘은 시각. 성마르게 동이 터오자, 무거운 궁둥이를 떼고 자리를 뜨지 못한 밤의 흔적들이 몰려오는 아침의 사람들에게 치부를 보인다.


 


밤의 복장을 아침에 마주하면 어째 조금 남세스럽다.


똑같이 흐트러진 것 같아도, 아침의 분주함이 뭍어난 옷자락과 밤의 여흥에 뒤틀린 옷깃은 전혀 다르니. 벌컥 열어버린 문에 아직 옷매무새를 채 다듬지 못하고 대강 여미기만 한 채 외도의 장면을 들켜버린 에로영화의 장면처럼, 햇빛은 자꾸자꾸 밝아오는데 밤의 흔적은 (무슨 잘못도 아니건만) 폭로되고 있다.



준비가 되지 못한 밤의 사람들은 무거운 엉덩이를 주춤주춤 옮기며 아침의 사람들 사이로 섞인다.
아침 사람들은 밤의 흔적들을 달갑게 여기진 않는듯. 그들의 찌뿌린 미간은 내뱉지 못한 잔소리같다.


 


아침의 복장은, 한나절만 지나 밤이 다시 온다면, 아직 긴장을 풀지 못한 회식자리의 초임교사처럼, 샌님같이 보일 시간이 온다. 밤사람이 늦은 잠을 청한 후 한나절이면 된다. 그 시간이 오기 전까지 옷깃을 마저 여밀고 아직 밤을 이어가고 있는 밤사람의 방으로 각자각자 줄행랑을.

2009년 8월 27일 목요일

호떡, 떡볶이, 포장마차_2009. 8. 27.

늙수구레한 남자가 퍼런 가스불 앞에 땀을 쩔쩔 흘리며 모로 앉아있다. 피곤하고 궁색한 입맛다심.


포장마차는 사내와 같이 바래지고 늙었고, 음식도 마르고 윤기가 없다. 원, 저래선 누가 사먹누.


 



그때 여지껏 아래 박스에서 짐을 뒤적거리느라 가판 위로 보이지 않던, 아주머니가 일어난다. 곱게 단장한 아주머니가 진열대 위로 떠오르자, 포장마차가 생기로 넘친다. 음식도 반들거리고, 사내는 더이상 피곤하고 궁색해보이지 않는다. 포장마차 덮개의 켜켜이 앉은 먼지는 저 길목을 견뎌낸 시간의 상징으로. 떡볶이 1인분 사가볼까.


 



아주머니가 고개를 들고 나타난 순간 사내가 호떡-떡볶이-포장마차와 묶여있던 표상의 끈들이 모조리 재배치된다. 여자는 꽃이다,라는 말이 아무리 페미니스트에게 원투펀치를 맞는다해도, 저 포장마차의 여자는 분명 찬란한 꽃이다.

2009년 8월 12일 수요일

가난한 집엔 아기가 운다

교수는 들어와선, 시계를 흘끗 보곤, 내가 회의 중에 나왔거든, 한 30분만 더 있음 되겠는데, 그동안 "극도의 가난"에 대해 원고지 1000자 정도로 글을 지어보게들, 하며 인쇄된 원고지를 훌훌 나눠주고 나간다.

학생들은 갑자기 쥐어든 갱지 원고지가 잠시 싫기도 하나, 금세 자기 글에 도취되어 써간다. 잠시 후 들어온 교수는 원고지를 거둬들여 잠자코 훑어보다 몇몇 문장을 읽기 시작한다.

대개 "극도의 가난"은 다음의 요소로 표현되고 있었다 ; 아기가 배고파서 울거나, 아기가 자기 똥 위에 앉아 방치돼 울거나, 아기가 병을 앓아 울거나, 아기가 울거나.

뭔 애는 그렇게 밤낮 없이 울어쌌는지 모르겠으나 으레 가난한 집엔 아기가 운다. 애석하게도 내 글에서도 아기는 울고 있었다. 이쯤에서, 아기 울음 소리를 전면 배치했는가, 정조를 위해 후방배치정도로 두었는가가 그나마 학생들의 차이벌리기로 작용할 따름. 어쨌거나 온 학생의 글에 아기는 짹짹 울어대고 있었건만, 모두의 글에서 아기가 울고 있음을 발견하기 전까지, 다들 적게든 많게든 자기 글의 독창성에 뿌듯해서 읽고 또 읽었다.

지인 A양은 아현동 웨딩샵 길에서 자신의 소설의 앞머리를 발견했던 이야기를 씁쓸하게 들려준다. 홍대에서 이대로 가는 길목엔 웨딩드레스를 빌려도 주고 팔기도 하는 가게들이 즐비한데, 연달아 선 가게들 끝엔 좁고 새카만 문을 하나같이 닮은, 물보라니, 밤안개니, 포옹이니 하는 이름의 유흥주점들이 있어, 여자에게 주어지는 요조숙녀 혹은 양공주의 이미지 대비가 강렬하다는 것이며, 거기에서 뒤웅박팔자를 타고난 여자의 이야기가 퍽 흥미롭게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A양의 머리에 스쳤다는 것이다. A양은 잠시 번뜩이는 전율도 느꼈고, 손에 땀도 났으며 미친듯 메모도 휘갈겼다. 그러던 며칠 후, A양이 속한 소설창작 모임 구성원 중 4명이 아현동 웨딩샵 길에서 전율을 느끼며 메모를 휘갈겼고, 그 중 2명은 소설의 앞머리를 몇 장 써보다 구겨 버렸으며, 1명은 아직도 한글 프로그램의 커서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쓰는 중임을 알았다. A양은 헛헛하게 웃으며 메모를 감췄다.

전형성과 유형성에는 이 외로운 생활에, 오냐 너도 알고 나도 아는구나, 조금 덜 외로운 것도 같구나, 하는 공감의 여지가 있어, 위안이자 축복이 된다. 그러나 가난한 집에서 일제히 아기가 울 때에는 이 위안과 축복이 저주가 된다.

2009년 8월 6일 목요일

신도림역 부근_2009. 8. 5.

사람들이 아주 빽빽하게 오가는 곳이 아니고서는, 대개 팔벌려공간 정도는 앞뒤로 확보해주는 것이 보행자들 간의 암묵적 약속이다. 뒤따르는 놈은 앞서가는 놈의 발뒤꿈치를 밟을 정도로 가까이 따라가지 않으며 옆사람 팔에 닿을 만치 붙지 않는다.


 


이 '보행자 반경'의 투명선을 성큼, 넘어서는 사람들이 있다. 취객과 '도를 아십니까'.


취객은 보행자 반경을 지킬만큼 여유가 있어보이지 않으며 (그는 달겨드는 땅과 벽을 피하기에도 바쁘다), 그러니 '술이 웬수'라고 읊조려주면 서로의 정신건강에 좋다.


 


요즘 후자, 그러니까 '도를 아십니까' 류의 사람들의 공격성이 유난히 강해졌다. 그 접근 전술이 다채로운 것은 진즉에 알고 있다. 기가 맑다 하다가 팔뚝을 잡거나, 길을 묻다가 팔뚝을 잡거나, 짐 좀 잠깐 들어달라다가 팔뚝을 잡거나, 심리테스트 중이라며 검사지를 내밀다 팔뚝을 잡거나, 팔뚝을 잡거나.


그런데 오늘은 유난 육탄전이다. 치한 선발 기준에도 손색 없을 만치 바짝 몸을 붙이는 것은 물론이요, 잰 걸음으로 지나치는 사람 손목을 홱 채여 붙들고, '내귀에이어폰이보인다면내가반귀머거리인건알겠지요' 재스쳐도 간단 무시.


내 앞을 걷던 여자는 다른 생각을 하며 걷다 갑자기 붙들렸는지 놀라 비명을 꽥 질렀다. 어머 많이 놀라셨어요, 하며 놀람과 공포와 짜증으로 버무려진 여자 얼굴에 대고 하하 웃는다. 원 저 사람, 붙임성하곤.


 


여자를 놓아 주고 뒤에 오던 내게 잽싸게 다가온다. 나는 두 팔로 크게 손사래치며 지친 표정으로 "됐어요"라고 말해보아도 끝내 손목은 한번 붙들고 놓는다. (<프리그립운동>인가?)


 


이들의 육탄전에는 애석하게도 별 대응법이 없다. 걸어오는 말을 진지하게 듣고 따라가서 냉수마찰 후 조상님께 제사를 20만원에 올리고 와도, 맞서서 이런 짓이 얼마나 공격적인지에 대한 설교를 늘어 놓아도, 이기는 축은 못된다. 그저 무시하고 돌아서는 게 상책이다 싶어도, 놀라고 불쾌하고 피곤한, 감정적 부산물을 처리하는 것은 내 몫이니, 역시 지는 꼴. 반드시 이기자고 하는 소리도 아니건만, 늘 지니까 이거 슬슬 배알이 꼴린다.

오늘도 끄적거리네

핸드폰 메모기능을 쓰는 것보다 가방에서 주섬주섬 수첩과 펜을 꺼내 한쪽 다리가 저린 사람마냥 다리로 받침을 올렸다 놨다 하며 끄적대기가 익숙하다. 익숙하다는 게 좋다거나 편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꽤 수고스러울 뿐더러, 나중에 보곤, 뭐 이런 걸 가는 길 멈추고 깽깽이를 뛰어가며 썼단 말인가 싶은 게 팔할이다.


 


없는 살림살이엔 아껴아껴 써야한다. 나는 파인만처럼 아이디어가 장마철 둑 터진 중랑천모양 흘러 넘칠 때가 거의 없으므로, 일년삼백육십날이 가뭄인 실개천처럼 쪼로록 두어 방울, 그마저도 햇빛 한번 쨍 해버리면 고여 흐른 흔적도 간수 못할 아이디어 빈곤층이라, 떠오르는 무엇이든 되도록 담아둔다. 물 관리가 그모양이니 수질이 좋지 않다.


 


종종 하우스의 다그침을 생각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각을 내놓을 때는 이것이 잉여정보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지 않는 편이 결정적 키워드가 될 것이라는, 빈곤층 다운 믿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생각에는 우열이 없다. 생각의 민주주의를 허하라. 생각이 서로서로 말하게 하라) 수년 간 모인, 형편없는 메모가 적힌 수첩들을 곁눈질한다. 마치 출간된 내 책을 보는마냥 슬쩍 웃어도 본다. 쿤데라는 사람들이 '내 집' 혹은 '우리 마을' 등을 말할 때와는 달리 '내 책 mon livre'을 말할 때, 리-브흐의 앞을 자기 만족에 가득한 한옥타브 높고 긴 발성을 한다는 점을 키득댄다. 이 이방인 노인네는 수년 간 프랑스인들의 '리-브흐'를 빙글빙글 웃으며 들었을 것이다. 수첩을 향한 내 곁눈질도 (우습지만) 반 옥타브 에스컬레이트 된다. 심지어 미지의 독자를 향한 남서광의 자부심도 결여되어 있건만.

2009년 7월 29일 수요일

걸인을 스침_2009. 7. 29.

손금 사이사이로 검은 때가 찌든 걸인이 휘청거리며 다가와, 배고픈데 돈 좀 줘요,한다.

작은 지갑을 뒤적거리니 동전 몇 개가 나와 대강 그걸 주었다. 돈을 낚아채듯 돌아선다.

 

차례로 지영, 채플린, 바우만을 떠올린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지영이 미쳐버린 걸인을 마주하고

옷깃을 여미며 발길을 재촉하듯 나도 도망치듯 그와 멀어진다. 걸인의 위협은 수많은 보험상품과

노후보장 금융상품을 먹여살린다. 이 상품을 구입하는 고객님께는 윤택한 삶을 드립니다, 걸식하

는 일은 없지요, 한순간입니다, 추락은 요, 그러니까 고객님, 새 상품이 나왔는데...

 

<키드>. 위층에서 내던지는 쓰레기 더미와 연속하여 떨어져있는 어린아이. 채플린은 아이를 간신히

받아든다. 쓰레기와 어린 아이의 과감한 병렬. 바우만보다 수십 년을 앞서 <쓰레기가 되는 삶>을

예언한다.

 

그와 멀어지고 한여름의 해가 길게 뉘어있어도 한기는 가시질 않는다. 햇빛은 잔인하고 그의 검은

팔은 땀으로 번들거린다. 오늘따라 바람도 불지 않는다.

2009년 7월 24일 금요일

까페 안_2009. 7. 24.


옆자리 여자는 남자의 몇 마디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잔뜩 꼬집는 표정을 하곤 "너 AB형이지?"한다.
혈액교 신도에게 대뜸 혈통부터 의심받은 남자는 "아니야!"라며 성질을 낸다.
최근 10년간 한국은 AB형이나 B형을 성격이상을 일으키는 바이러스 보균자로 보는 사람이 적잖이 늘었다. 심지어 여자는, "아니야, 딱 너같은 애들은 꼭 AB형이야"라며 골수이식도 안한 남자 혈액형을 바꿔드린다.
여자에겐 용납될 수 없던 남자의 멘트들은, 피의 성격을 파악하여 "그럼 그렇지"로 귀결되고 있다.
저 남자의 누명아닌 누명은 혈액형에 대한 여자의 굳건한 믿음 앞에서 씻을 길이 없어보인다.


(나는 지난 대보름날 귀밝이술도 먹지 않았으므로, 위의 대화들이 내 귀에 흘러들어온 것은, 결코 자의가 아님을 밝혀둔다. 여자분 목소리는 가히 싸이월드 '전체공개' 수준이다.)

2009년 7월 3일 금요일

형광펜 효과

세미나 준비로 책과 다큐멘터리 등등의 목록을 훑고 있는데, 몇몇 심약한 저자와 감독들은 타인들의 이 '훑기'를 어떻게 이겨낼까, 짐짓 걱정이 되기 시작.


 


그러니까 죽을둥 살둥 잠은 자는둥 마는둥 씹는둥 삼키는둥 내새끼 내자식처럼 낑낑대며 만들어 내어놨더니, 이게 있는줄 없는줄도 모르게 존재감이라곤 동네 배고픈 개도 눈길 한번 안줄 모양새같으니, 이걸 어찌할꼬 싶은 것이, 훑어대는 놈 눈을 콱 잡아다 돌리지도 못하게 쫓아다니면서 형광펜을 콱콱 칠하고 싶은 마음을 말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남에게, 남이 만든 것들에, 남들 인생에 흥미가 없다는 점을 상기시켜 그 심약한 창작자들은 눈물을 거둘 일이다. 여기저기 흠만 잡히다 존재감도 없이 구석에서 먼지만 뒤집어 쓰고 있는 '내 새끼'에 대한 건강한 애정법은, 따로 있을 터. 이거 나도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듣보잡'의 운명이 내눈에도 보이는 '내 새끼'를, 어떻게 사랑한다?

차도와 인도사이_2009. 7. 3.

 


보도블록과 아스팔트 사이에는 시멘트를 부어놓은 길다란 공간이 있다.


개발자국과 사람발자국이 나란히, 엇갈려, 어지럽게 찍혀있다.


시멘트가 덜 굳은지 모르고 딛은 발바닥은 그 흔적도 황망한 채 굳어있다.


재밌겠다, 족적이나 남겨보자,는 발바닥은 모양새도 기세등등.


반면 견공의 발자국은 한 곳을 향하여 묵묵히 걷고만 있다. 갑자기 딛던 땅이 물렁해졌다고 보폭이 좁아들지도 않고 앞만 보고 사라진다. 진흙에 젖은 줄만 알았던 발바닥이 왜 자꾸 딱딱하게 굳는지만 나중에 곤란해했을 모양새다.


 


굳기 전의 시멘트에 이거, 발서명좀 해볼까, 하는 그닥 고상하진 않은 욕구를


수많은 사람들이 그래 넌 좀 잘났다, 남겨봐라,고 허락해서 형식을 갖춰준게


각종 행사장의 핸드프린팅 아닐까.


 


 



이 사람들, 괜히 신나보이는게 아니라니까.

2009년 6월 30일 화요일

횡단보도 앞 노점상_2009. 6. 30.


 


오이, 참외, 토마토에 쓰여진 표시는 대개 가격표가 그렇듯 위압적이다.


오이 한무더기는 좌우지간 2000원이니까 없으면 꺼져,식이랄까.


그에 반해 "우산/은 3000원/이에요"의 서술형 가격표시는


여지껏 채소팔다가 갑자기 우산팔아서 죄송합니다,하는냥 저자세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할머니는 오이를 들추던 아줌마보다, 여기 우산 다 삼천원이에요? 묻는 학생을 좀더 반겼다,고 생각들던게 단순히 내 오해라면 할말 없다.

애도의 차 한잔

2009년 6월 8일 월요일

뭐 먹고 사느냐 물으니

엄마 가게 일을 도왔는데, 이게 돕는 게 돕는 게 아니다. 다른 직원 아주머니 말로는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지경. 이런 일이라곤 해 본 적 없는 치들이 나방처럼 우,우, 몰려다니니 도움은 커녕 볼썽사납다. 숨어보려해도 몸이나 작나. 헛헛한 웃음만 피식거려도 잃어버린 낯짝은 돌아오기 쉽지 않다.


 


가게에 하등 도움 안되는 것은 엄마 제외 모든 식구 마찬가지. 다들 몸뚱이는 커서 숨지도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어물쩡 비켜 서있다. 아니, 비켜서있다고 착각한다. 직원들에게 걸리적 거리는 것을 보아 어디로 비켜야 잘 비키는 줄도 모른다.


나 이런 일도 못해서 어쩌지, 나 뭐먹고 살아? 하니 엄마 눈이 모로 찢어지며, "이런 일 안하면 되지!"하고 쏘아붙인다. 농담이라고 가는 뒷통수에 대고 얼버무려봐도 엄마는 저으기로 바삐바삐.


 


딱 너같은 딸낳아라, 같은 엄마가 딸에게 하는 저주의 클리셰를 들어본 적은 없으되, 엄마는 나처럼은 살지마라는 말을 저런 식으로 한다. 나는 빨간색 삼선슬리퍼를 신고 뒷골목으로 나가서 시멘트 부을 때 나눠놓아 생긴 바닥의 실선을 따라 고무줄 없이 고무줄을 뛰었다. 숨지도 앉지도 서지도 비켜나지도 못하고 어물쩡 있던 작은 언니가 나와 같이 고무줄을 뛰었고, 곧 큰언니도 나와선 딱따구리구리마요네즈를 뛰었다. 엄마의 모로 찢어지는 눈은 딱따구리가 물고 날아가주면 좋다.


 


 

2009년 6월 4일 목요일

슈퍼마켓_2009. 6. 4.

진짜 과즙이 듬뿍 들어갔다는 딸기우유는 딸기 함유량이 1.6%인 것으로 보아, 이전 딸기우유들은 딸기를 1나노그램 넣은 것으로 알고 '비교적 향상되었음'에 감사해야할 것인지, 내가 모르는 사이 '듬뿍'이라는 부사의 뜻이 바뀐 것인지를 고민케 하였고,
죠스바는 '발렌시아 오렌지'라는 새로운 맛을 출시하였는데, 당최 그 발렌시아 오렌지라는 의문의 과일은 발만 담갔다가 사라졌으니.
과일의 흔적을 쫓느니 그냥 과육을 사자하여, 포도를 한 봉지 들었는데, 아주머니는 그램을 달아보지도 않고 두 근이 넘네, 하며 5900원을 판결한다. 비루한 손저울이나마 아무리봐도 두근은 안되어보여, 이게 두 근이 넘어요?라고 묻지만, 재심은 허하지 않는다. 꽝꽝꽝.

2009년 6월 1일 월요일

귀가길_2009. 6. 1.

버스 안.

남자가 무슨 말을 하자 여자는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입술아래로 이빨이 끝부터 스물스물 기어나오더니 붉은 잇몸까지 드러난다.
이빨은 꽤 가까이서만 볼 수 신체부위라 이빨을 보고나면 뭔가 그사람과 아는 사이 같은 착각이 든다.
토토로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씩 웃을 때, 나는 그 미소의 호의적인 느낌보다 빼곡하게 자리잡은 건치때문에 무장해제되곤 했다.

그렇다면 망했군

여기 내가 있는가, 내가 보이는 걸까, 저 사람은 나를 스쳐지나간 것도 모르겠지.

길을 걸으며 내가 안보인다는 생각을 한다. 대여섯 살부터는 줄곧 버릇처럼 해왔다.
극적으로 우울함을 연출하던 십대 중반에는 이 생각을 전면배치하기까지.
그래서 처음 도둑질을 계획한다; 슈퍼에서 물건을 그냥 가지고 나와보자, 잡히면 내가 보이는 거겠지.

내가 가지고 나오려던건 칫솔이었다. 칫솔도 없이 살 형편은 아니었다. 정말 있어보이는 칫솔, 그러니까 앞머리에 형형색색의 이를 특별히 잘 쑤셔줄 것 같은 특수모가 배치되고 잇몸이 피안나도록 모질이 부드럽고 손잡이는 안미끌어지는 탄성좋은 재질로 된 뭐 그런 칫솔도 아닌 싸구려 칫솔이었던 걸 보면,
칫솔 자체가 내 물욕을 자극한 것은 아니었다.

내 어깨를 잡아채서 "계산 안했지"라던 마트직원은 내게 반성문을 쓰게 했다.
잘못했습니다, 난 내가 보이는지 알고싶었어요,
이 두 문장에서 뒷 문장은 영 안먹힐 것 같아서(핵심은 바로 거기 있는데도!) 뒤는 안쓰고 앞만 한 백몇 번 쓰고 풀려났다. 기껏 쓴 반성문은 본체만체하고 직원은 내 이름이 자기 애인하고 비슷하다며 부모님한테 연락않고 한번만 봐주겠다고 했다. 와, 낭만적이다. 같은 것도 아니고 비슷해서라니. 살면서 이름 덕 본 건 그때가 처음이다.
잘못했습니다 반성문 백 번 써봤자 비슷한 이름 앞에선 별수없네.

쿠엔틴 타란티노는 어린시절, 마트에서 레너드의 소설을 계산않고 나가다가 감방신세를 졌다고 한다.
나는 왜 '있어보이게' 소설을 가지고 나오지 않고 고작 칫솔이었나.
내가 보이는지 안보이는지 굳이 칫솔 아니고 책, CD, 명화도록 등등, 그러니까 나중에 그게 책을 너무 읽고싶어서, 음악이 너무 좋아서, 좋은 그림을 보고서 매혹당한, 장차 큰 예술가가 될 사람의 철없던 시절의 일화 따위로 아름답게 오해될 수 있는 물품이 아니고 왜 칫솔이냔 말이다.

어린 시절, -이런 말이 성립이란게 된다면-악의없는 도둑질을 할 때,
그 품목이 무엇이었나가 미래를 결정하는 걸까, 하고 영양가도 없는 생각을 문득.
그렇다면 난 망했군.
치과의사, 치위생사 참 할 것도 많건만 나는 이빨 교정만 당해봤다. 칫솔로 운동화나 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