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16일 월요일

<어느 비평가의 죽음>, 마르틴 발저

 제가 선생님께 상기시켜 드리고 싶은 점은 실패는 일종의 병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병에 걸린 사람은 사회적으로 대인관계가 껄끄럽습니다. 실패자는 ㅡ 제가 실패한 사람을 이런 명칭으로 불러도 좋다면 말입니다만 ㅡ 자기 자신한테보다도 주위 사람들한테 더 민망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실패자에게는 자신의 실패가 엄청나게 큰 확대경이며, 그는 이 확대경을 통해 온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 성공한 사람도 아직 그렇게 보지 못했을만큼 그렇게 세밀하게 세상을 보는 것이죠. 세상을 대강 보는 것이야말로 성공의 조건들 중의 하나인데, 모든 직업이 다 그렇죠.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인지할 능력이 없는 것, 이것이 성공의 조건입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세상을 미화해서 봅니다. 그가 설령 어떤 사물이나 어떤 인물에 반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미화하는 반대자일 따름이죠. 그는 항상 빼어난 사람으로 살아남게 되고 세상은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한 사람이 있기에 세상은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한 사람이 세상에서 성공을 거두기 때문에 세상은 좋은 것이죠. 그러니까 이 세상의 근본적인 불행은 그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성공합니다. 무엇인가가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으면 ㅡ 사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말입니다 ㅡ 그건 그에 의해 극도로 비난 받고 저주를 당합니다. 그는 세상이 더 개선될 수 있도록 이 세상에 온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의 현존 상태에 대한 가장 과격한 비판자이지만, 그의 존재의 분위기를 통해 사람들은 이 세계가 구원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에 대해 세상은 그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세상의 개선 가능성을 믿지 못하고 이 세상이 삶의 좌절을 가져오는 불변의 체계라고 여긴다면, 그는 실패자이며 세상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되죠. 그러나 자기 자신의 신경을 거슬리게 되지는 않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말이죠. 실패자의 충족은 사실 그가 거슬리게 되는 이 세상을 완전히 알게 되는 점에 있습니다. 이 인식을 통해 그한테서는 풍부한 지식이 자라나고, 그 속에서는 마치 휘황찬란하고 온갖 음향이 흘러 넘치는 낙원에서처럼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도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모든 통찰의 조건이 실패라는 사실이 실패를 지고의 선 그 자체로 만듭니다.

아직 듣고 계세요?

 
위의 글에서 실패자(루저)란 말이 나와서, 사족의 메모 :

루저라는 단어가 그 어망에 포획되는 사람에겐 좌절감을 준다고들 하는데, 나는 루저에게는 열려있는 방편이 있으므로 (진 다음에는 이길 수 있으니까) 그닥 위험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잉여나 쓰레기 쪽이 더 무서운 것이다. 남아도는 존재가 머물 남아도는 자리는 없으므로.
누구나 다리를 딛고 설 자리가 필요한 것인데 땅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 잉여자가 있을 공간은 전 지구를 통틀어도 한뼘도 없게 된다. 부피를 가진 자가 자신을 얼마나 쪼그라들게 해야 한자리씩 하는 사람들 눈에 '덜 거슬리게' 한 켠에서, 없는 것처럼 살아남게 되는 것인가.
그래서 너 졌어,가 아니라, 넌 누구냐, 왜 여기서 얼쩡거리냐,가 더 공포스럽다.


남아도는 개체수를 조절하기 위해 절벽에서 뛰어내려 집단자살한다는 레밍에 대한 와전된 말들처럼, 잉여자가 택할 유일한 방법은 자발적으로 절벽아래로 사라져주는 것이라면. 잉여자를 꼴사납게 보는 눈들은 그 방법을 은근하게 바란다면 어떤가. 내겐 더없는 납량특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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